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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댐 May 08. 2019

내리는 눈도 쓸어야 한다

비 같은 일과 눈 같은 일들

군대에서 눈이 내리는 날엔 신병만 웃는다. 아직 제설작업을 해보지 못한 이에게 부대에서 처음으로 맛보는 눈은 잠시나마 억눌린 감정을 정화해준다. 도시의 크리스마스 풍경을 상기시키는 낭만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러한 기쁨은 오래가지 않는다. 눈삽으로 모래 더미 같은 눈을 퍼 나르고, 긴 빗자루로 기동로를 쓸다 보면 땀이 뻘뻘 나고, 하지 않아도 될 고생을 선물처럼 안겨준 녀석에게 입에서는 기침처럼 욕이 터져 나온다.


하지만 진정으로 화가 나는 것은 그 작업의 힘듦에서 오지 않는다. 진짜 분노는 막 작업을 끝내고 들어오자마자 놀리듯이 다시 내리는 눈의 속성에서 온다. 눈이 한창 많이 내리는 시기에는 일주일 내내, 하루 종일, 전 병력이 교대로 눈을 쓸어야 했다. 밤이라고 눈이 그치지는 않으므로, 밤에도 중대별로 순번을 정해서 눈을 쓸곤 했다. 우리 중대의 제설 순번이 12시부터 새벽 2시거나, 2시부터 4 시인 경우에는 제대로 잠을 잘 수도 없어서 짜증이 극에 달했던 기억이 난다.


내리는 눈을 쓰는 일에는 보람이 없다. 철새의 편대비행처럼 브이자 대형으로 서서, 앞으로 눈을 쓸며 걸어가는데, 길의 끝까지 가서 뒤를 돌아보면 정확히 쓸어낸 만큼의 눈이 그대로 쌓여있으므로, 그 길을 거꾸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그리고 다시 돌아왔을 때는 열심히 쓸어냈음에도 역시 하얗게 덮여있는 길이 뒤로 펼쳐있다.


어차피 내릴 눈이라면, 그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한 번에 쓸어내면 되지 않느냐는 질문을 나도 했었다. 그렇게 해도 상관없다면 미쳤다고 이러고 있겠냐고 선임은 뚱한 표정으로 대답해주었다. 눈은 비와 달라서 그러면 큰일 난다는 것이었다. 내리는 비를 닦아내는 건 미련한 짓이지만, 눈은 쌓이고 어느 정도 지나면 굳어버려서, 대비나 눈삽 같은 것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작업이 된다고 했다. 눈을 걷어내겠답시고 수많은 장병들이 눈밭을 걸어 다니게 되면 부대의 모든 바닥은 판판한 얼음처럼 굳어지고 차도 보급도 들어올 수가 없게 된다고 했다.


우리가 사는 땅에 때로는 비가 내리고 어느 때는 눈이 내리는 것처럼, 우리의 인생에도 비와 눈이 번갈아 온다. 그칠 때까지 처마 밑에서 잠잠히 기다려야 하는 비 같은 일은 보통 불가항력일뿐더러, 굳이 맞서지 않는 편이 현명할 때가 많다. 사랑하는 이와의 이별이나 가까운 사람의 죽음, 면접 탈락, 투자나 사업 실패 같은 일들이 그렇다. 그 아픔은 실컷 쏟아붓다가 언젠가는 그치게 된다. 그 아픔은 잊으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더 예민하게 와 닿아서, 잊으려는 마음 때문에 더 아파지기도 한다. 하지만 오래 내리는 장마도 여름보다 길지는 않듯이, 거스르지 않는 마음으로 지내면 결국 지나간다는 것을 매번 새로이 배운다.


하지만 눈 같은 일은 다르다. 서운함이나 아쉬움은 눈처럼 쌓이는 법이라, 그때그때 쓸어주지 않으면 걷잡을 수 없이 쌓이고, 단단히 굳는다. 부부싸움이 일어날 때마다 해묵은 섭섭한 일들이 끊임없이 소환되는 이유도, 좋아하는 이에게 고백하지 못한 아쉬움이 한참이나 지난 후에도 찝찝하게 남는 이유도, 꿈을 이루기 위해 용기 내지 못하고 현실에 타협했을 때의 미련이 오래 이어지는 이유도 그 눈을 적시에 쓸어내지 못한 이유라고 나는 생각한다. 인내심을 가지고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는 지혜와, 쌓여 굳기 전에 눈을 쓸어내는 지혜를 가질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그때의 제설작업을 떠올리며, 문득 들었다.


삶의 갈등을 눈과 비로 비유해보면서 얻을 수 있는 위안도 있었다. 눈을 제때 쓸어내지 못했다고 해서 영원히 비참해할 필요는 없다는 것. 단단히 쌓인 눈도 여름까지 버텨낼 재간은 없다. 시간은 조금 걸리겠지만 길에 쌓인 눈은 봄볕에도 녹는다. 시간은 모든 걸 해결해준다. 그럼에도 녹지 않는 미련은 산꼭대기의 만년설 같은 것이니, 누구나 조금씩은 가지고 있는 법이겠지. 내 속에서 쓸어내지 못한 눈의 난감함이 조금은 덜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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