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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댐 May 11. 2019

당신이 3000배를 하더라도

그냥 쓰기

스무 살 무렵, 인터넷에서 우연히 어떤 글을 봤다. ‘그냥 걷기’라는 제목의 글은 디시인사이드에서 연재되고 있는 일종의 여행수기였다. 나는 한결 같이 커뮤니티 같은 것에는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해서 연재 중에 실시간으로 본 것은 아니었고, 뒤늦게 인터넷 어딘가에서 링크를 걸어둔 것을 보고 글을 접하게 되었다.      


글쓴이의 ‘그냥 걷기’라는 글은 무기력한 한 청년이 그냥 걸어서 전국을 일주하는 얘기였다. 그는 정말 ‘그냥’ 걸었다. 제대로 된 운동화나 장비도 없이 그냥 집에서 슬리퍼 찍찍 끌며 나온 채로 걸어다녔다. 물집이 잡히고 발가락이 쓸리면서도 미련하게 제대로 된 워킹화도 없이 부산까지 갔다. 자세히 기억은 안 나지만 그는 국도를 따라 그냥 걸어가면서 부산까지 당도했고 그렇게 전국을 빙빙 둘러 다시 집까지 돌아왔다.     

 

그 글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마지막 완결화였다. 그가 밝힌 지난한 여행(혹은 고행)의 소감은 내 기대를 완전히 무너뜨렸다. 요약하자면 이런 식이었다.


‘내 바람과는 달리, 아무것도 달라진 바 없고, 깨달은 바 없다. 이렇게 끝내고 싶지는 않았지만 아무튼 끝났다. 이제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     


모험담이나 성공담, 여행서적에서는 고난의 끝에 늘 교훈과 진리가 있었다. 그들은 남들과 다른 경험을 통해 인생이 송두리째 뒤바뀌었고, 모두에게 모험을 권유했다.      


하지만 변변한 장비 하나 없이 맨발로 대한민국을 일주한 그는, 자신과의 싸움을 이겨낸 뒤에도 일말의 홀가분함 없이 자신의 글을 마무리 지었다. 그 혼란이야말로 날 것 그대로였다.     


매일 글쓰기를 하면 생기는 변화를 떠드는 책은 많다. 매일 글 쓰는 습관은 당신의 인생을 완전히 뒤바꿀 것이고, 더 이상 흰 여백이 두렵지 않게 될 것이라고 했다. 나는 매일은 아니라도 일주일에 적어도 한 편씩 글을 썼다. 그렇게 2년 반을 썼다. 하지만 여전히 내 인생은 변하지 않았다. 흰 여백은 여전히 두렵다. 글 솜씨가 늘었냐 하면, 사실 2년 전의 글과 별다를 것이 없다. 오히려 일기처럼 안일해진 듯도 하고, 2년 전이 밀도 있는 글은 더 많았다는 생각이다.      


여행도 그렇다. 많이 다니지는 않았으나 거의 혼자 다녔다. 국내로도 갔고, 해외로도 갔다. 나는 거의 걸어 다녔고, 그곳에서도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사람들을 새로 만났다. 그렇게 해서 어떤 교훈을 얻었냐면. 그냥 일상에서 얻는 만큼. 딱 그만큼 얻었다. 전혀 새로운 깨달음이 없었다는 것은 아니지만, 자랑할 만큼의 거창한 무언가가 없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알 것 같다. 인생은 짧은 이벤트로 드라마틱하게 바뀌지 않는다. 혼자 하는 여행의 대부분은 외롭고 지루한 시간의 연속이고, 치열한 연구 없이 쓰는 글은 작가의 경지에 다다르기엔 멀다. 당신이 3000배를 하더라도, 42킬로 마라톤 완주를 하더라도, 네팔의 꽤 높은 산에 한 번 오르더라도 기대하는 만큼의 짜릿한 진리는 없을 것이다. 고난의 끝에 초월자가 되는, 애초에 그런 아름다운 경험은 흔히 주어지지 않는다. 때로는 단순한 사건이 큰 깨달음을 주는 것처럼 거창한 행동에는 별 교훈이 없을 수도 있다.       


나는 2년 반 동안 글을 쓰면서, 딱 2년 반 동안 글 쓴 만큼 능숙해졌다. 한 시간 정도에 한 장에서 한 장반 분량의 글을 여러 번 쓰다 보니까, 글감이 떠오르는 날에는 오늘도 쓸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정도다. 그러니까 아주 거창한 교훈이나 발전이 아니라, 소소할만큼 적당한 성장을 했다. 여행을 다녀왔을 때는 딱 여행 갔다 온 만큼의 적당한 깨달음과 충격을 얻어왔다.      


내가 내일 당장 불상 앞에서 일만 배를 하더라도, 혹은 마라톤 완주를 하더라도 내 인생은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을 것이다. 그냥 내 인생에는 일만 배를 한 경험과, 마라톤 완주를 한 경험이 남을 것이다. 그 경험들은 다만 나를 이루는 작은 부품이 될 것이다.      


언젠가 내가 글에서 보았던 ‘그냥 걷기’의 그는, 그 여행으로 대단한 깨달음을 얻지는 못했지만 그토록 정직하게 자신의 삶의 깊이를 더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야구에서 타자들은 은퇴할 때까지 몸 쪽 빠른 공을 무서워한다던데, 세상에는 그저 평생 어려워할 것들 투성이인 것 같다.


돈오점수의 경지에 너무 기대지 않고 그냥 평생 어려워하기로 한다. 깨달음을 얻으려는 여행이나 글쓰기는 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냥 걷기’의 그가 그냥 걸었듯이 나도 그냥 걷고, 그냥 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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