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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댐 Jun 14. 2019

맞는 말만 하다 죽어라!

-  옳고 그름보다 중요한 것들

피곤한 사람이다. 나는 옳고 그름을 너무 따진다. 누군가와 가벼운 언쟁이 벌어질 때, 내가 옳다는 확신이 들면 절대로 사과할 마음이 들지 않는다. 이렇게 끝까지 싸우다간 회복이 불가능하겠다 싶어도 한 수 접어줄 용의가 생기지 않는다. 이기고 지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상대방과의 관계가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자꾸 그렇게 된다.      


이상한 자존심인지 뭔지, 나라는 사람은 가끔 너무 매정하고 여유가 없다.      


일전에 만나던 여자친구와 싸운 적이 있다. 지금 생각하면 뭐 이리 유치한 걸로 다 싸우나 싶지만 아무튼 그때는 심각했다. 카카오톡 프로필사진으로 벌어진 일이었다.     


당시 나는 항상 여자친구와 같이 찍은 사진을 프로필 사진으로 해두었는데, 어느날 친구들과 즐겁게 술을 마신 일이 있었다. 집에 오자마자 바로 엎어져 잠이 들었다가 술이 깨고 일어나니 전날의 술자리가 너무 유쾌해서 뭔가 기념을 해야할 것 같았다. 기존의 ‘프사’를 전날 친구들과 함께한 술자리 단체샷으로 바꾸었는데, 여자친구한테 얼마 지나지 않아 연락이 왔다.     


- 오빠, 프사 왜 바꿨어?
- 어? 그냥 어제 술자리 기념하려고.
- 프사 바꾸지마. 나랑 찍은 걸로 해.
- 나 금방 다시 바꿀거야. 며칠만 이걸로 해두게.
- 싫어 싫어. 나랑 찍은 걸로 해.


(잠깐의 옥신각신)     


나는 자꾸 억지스러운 요구를 하는 여자친구에게,

- 내 프사 내 마음대로 바꾸지도 못해?

하고 짜증을 냈다.     


프로필 사진 바꾸는 거야 별일도 아니니, 그냥 바꿔주어도 됐을 텐데. 불현듯 내 프로필 사진을 바꿀 권리가 나에게 없다는 것이 언짢아졌다.


어차피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사진으로 다시 바꿀텐데, 왜 이런 얼토당토 않은 요구를 하는 거지?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을 검열받는게 맞나? 자기는 나랑 찍은걸로 했다가 독사진으로 했다가 마음대로 바꾸면서.   

  

당시의 내 머릿속에는 논리적인 의문과 언짢음의 문장으로 가득해졌다. 나는 이게 얼마나 비논리적이고 이기적인 요구인지를 설명하기 위해 애썼다. 카카오톡으로 한동안의 설전이 벌어졌고, 양측 다 한치도 굽히지 않고 자신의 주장을 펼쳤다. 아무튼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이유로 싸우게 된다는 게 너무 싫었다.      


연인만큼 가까운 사이라고 해도, 프로필 사진에 엄격한 규칙이 강제되는 건 말도 안된다. 논리적으로 여자친구는 억지를 부리고 있었던 거였다. 마무리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나: 내 말이 틀려?
여자친구: 어. 맞어! 맞는 말만 하다 죽어라!      


스마트폰 액정에 선명하게 표시되는 충격적 대사. 나는 뜨악한 표정으로 입을 벌리고 한동안 화면을 바라 봤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죽으라니. 내가 또라이를 만나고 있었나.     


코너에 몰린 그녀는 기분나쁜 마음에 에라 모르겠다는 마음으로 폭언을 한 것이었다. (그때 그녀는 고작 스물 한 살이었고, 나도 어렸다.)

그게 무슨 말이냐고 되물었는데 그녀는 답장도 없이 몇 시간이나 잠수를 탔다. 저녁에야 연락이 다시 되었고, 만나서 화해를 잘 하기는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냥 그건 싸울 일이 아니었다. 그냥 적당히 억지를 부리는 거라고 이해하고, 그 또한 나를 향한 애정과 사랑이라고 생각하고, 그리고 한 번 져주면 될 일이었다. 정 기분이 나쁘고 마음에 걸리면 만났을 때 감정을 터놓고 얘기했으면 됐다. 카톡으로 꼬치꼬치 논리관계를 따져가며 ‘내가 옳고, 네 생각은 틀렸다.’ 몰아붙일 일이 아니었다.      


많이 고친다고 고치는데, 친구들이나 가족들과 대화할 때 나는 여전히 자주 저런다. 내 생각이 맞아서 굽힐 수 없다고 생각되는 경우에는 알고보니 내가 정말로 맞았던 경우가 대부분인데도, 그 결과가 좋았던 기억은 한번도 없다. 그냥 상대방이 머쓱해하거나, 언짢아하거나... 분위기가 뻘쭘해지기만 했다. 그럴 때면 맞는 말만 하다 죽으라던 그녀의 말이 생생하게 소환된다.      


더닝 크루거 효과라는 게 있다. 잘 아는 사람일수록 자신이 틀릴수 있다고 생각해서 겸손해지고 어설프게 아는 사람일수록 지나친 자신감을 가지더라는 실험에서 도출된 법칙이다. 나는 내가 아는 것들에 자주 자신감을 가지는데, 그건 어설프게 알고, 어설프게 살고, 어설프게 생각하기 때문일거라는 반성이 가끔은 아프게 든다.  

    

맞는 말만 하다 죽어라!


지금 생각해 보면 그녀의 그 말이 나에게는 정말 맞춤형 조언이었는데, 그때 그 말을 좀 새겨들었으면 좋았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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