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때의 우리와 지금의, 우리.
*
대학교 1학년 때부터 학기 중에는 늘 자취를 했다. 순수하게 자취를 한 기간만 따져도 2~3년이 된다. 일반적으로 오래 자취한 남자라고 하면, 능숙하게 찌개를 끓이고, 김치볶음밥 정도는 능숙하게 할 수 있는 이미지지만 사실 나는 요리에 도통 관심이 없다. 기껏해야 집에서 가져온 반찬을 꺼내놓고 밥만 직접 해서 먹거나, 라면을 끓여먹고 도시락이나 밥을 시켜먹으면서 자취 생활을 보냈다. 대학에서의 시간이란 정말 쏜살같이 지나가는 편이어서 그렇게 방학이 되면 나는 다시 집으로 돌아와 얌전하게 어머니의 밥을 꼭꼭 삼켰다.
내가 요리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이유는, 들이는 시간과 공에 비해 먹는 행위가 허무할 정도로 빠르게 지나간다는 점 때문이다. 또한 너저분하게 늘어놓은 재료들과 설거지거리들을 치워야 한다는 것도 골치 아픈 일이었다. 나는 밥을 꽤 빨리 먹는 편이어서 웬만한 음식은 십 분안에 먹어치우는데 요리는 준비부터 조리, 뒷정리까지 하면 못해도 한 시간은 넘게 걸리는 점 때문에 나에게는 도무지 합리적인 행위와 거리가 멀었다.
내가 그렇게 한사코 멀리하던 요리를 참 열심히 해보았던 기억이 몇 가지 있는데, 그 중 가장 최근이 작년 크리스마스였다. (작년 크리스마스 이후로 요리다운 요리를 1년 동안 나는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던 걸 보면, 난 정말 재미없는 남자인 것도 같다. '요섹남'이라고 해서 요리하는 남자들이 이렇게 매체를 통해 쏟아지는데도, 꿋꿋하게 배우지 않는 걸 보면 내 고집에는 좀 못난 구석이 있다.)
나는 너에게 내 요리실력을 감추지 않았고, 그런 나를 넌 참 귀엽게 봐주었다. 작년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네가 나에게 요리를 해달라고 했을 때. 나는 사실 네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당황했었다. ‘나 진짜 요리 못해.’ 울상으로 대답하는 나에게 괜찮으니 꼭 보고싶다고 다정한 눈빛으로 쳐다보는 너를 이길 수 없었다.
올 해는 좀 덜했지만 작년 이맘 때 쯤에는 백종원이 TV를 장악했다. 거의 틀면 나올 정도였는데, 요리에 문외한이던 나에게 쉽고 간결한 레시피를 소개하는 그는 거의 구세주와도 같았다. ‘파기름이면 누구나 그럴듯한 요리를 할 수 있어요.’ 그가 말했고, 그 ‘누구나’에 내가 포함될 수 있을지 자신 없었지만 나는 믿어보기로 했다.
파기름 볶음밥과 스파게티를 하기로 생각했다. 스파게티야 시중에 파는 소스를 삶은 면과 볶아내기만 하면 됐으니 (그리고 꽤 그럴듯한 맛을 기복없이 내주니까.) 크게 걱정하지 않았으나 파기름 볶음밥은 연습이 필요했다. 크리스마스를 일주일 앞두고 나는 베이컨과 양파, 굴소스 등을 사가지고 와서 백종원식 파기름 볶음밥을 만들었다. 내 기억에 완성까지 거의 한 시간 반 정도가 걸렸던 것 같다. 기름이 사방으로 튀고, 생각보다 짜긴 했지만 맛있었다. 요리 별거 아니네. 호기로운 혼잣말도 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의 나도 참 귀여운 구석이 있었다. 한 번 해본 것으로는 크리스마스 당일 능숙하고 거만하게 요리할 자신이 없어서 3일 전에 다시 한 번 해봤다. 네 앞에서 만큼은 별일 아니라는 듯이 좀 무심하고 가뿐하게 해보이고 싶었다. 한 번 해본 경험이 있으니 이번에는 속도가 반 이상 빨라져서 30분 만에 뚝딱 만들어 냈다. 가스레인지 주변과 싱크대에 튀는 기름도 별로 없었고 재료 준비에도 요령이 생겨 뒷정리 할 그릇도 한참이나 줄었다. 꽤 자신이 생겼다.
크리스마스 당일. 미리 형에게 양해를 구해서 집을 너와 나만의 장소로 만들어 놓고. 너를 초대했다. 쓸고 닦고 완전히 새 집을 만들어 놓았다. 바닥에 잡동사니들을 큰 종이가방에 담아가지고 베란다 구석에 숨겨놓은 것을 너는 지금도 모를 것이다. 너를 배웅하려고 지하철역 에스컬레이터에서 올라오는 사람들을 한 명 한 명 확인하며 설레는 맘으로 기다렸다. 마침내 등장하는 너의 모습은 오타처럼 눈에 확 띄었다.
오빠 나 화장 안하고 간다.
깨끗한 얼굴이었지만 내 눈에 참 예뻤는데 너는 많이 쑥스러워했다. 예뻐. 화장 안 한 게 훨씬 나아. 나는 백퍼센트의 진심이었는데 너는 내가 선의의 거짓말을 해준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서 답답했다.
너를 방에다가 앉혀 놓고 나는 일주일새 두 번이나 연습한 그 파기름 볶음밥을 의기양양하게 하기 시작했다. 너는 방에서 기다리지 않고 내 옆으로 다가와서 내가 요리하는 모습을 계속 쳐다보았다. 두 번이나 해봤으니 막힘없이 술술 했어야 하는데, 그리고 사실은 나 되게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네 눈에는 한없이 어설퍼보였는지 너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내가 요리하는 모습을 동영상으로 찍고, 나는 부끄러워서 찍지 말라고 말리고. 그런 아웅다웅이 지금 생각해도 참 아름다운 그림이었던 것 같다.
나는 일주일 만에 그렇게 세 번의 파기름 볶음밥을 먹게 되었다. 네가 어찌나 맛있게 먹어주는지 앞으로 요리를 연습해야겠다는 잠깐의 다짐이 생기기도 했다. 극구 말렸는데도 네가 설거지를 해주었던 게 글을 쓰면서 생각난다. 참 귀엽고 사랑스러운 사람이었다.
시험이 끝났다. 마지막 학기여서 이번 학기는 두 과목만 수강하는 바람에 하루만에 싱거운 시험이 끝나버렸다. 친구들과 어제는 술 한 잔을 하고, 이런 저런 얘기를 하는데 누군가 크리스마스 얘길 꺼냈다.
그러고보니 크리스마스가 얼마 남지 않았잖아?
비슷한 시기에 다같이 솔로가 된 친구들끼리 쓴 소주만 연거푸 들이켰다. 오늘 아침 눈을 뜨는데, 문득 크리스마스에는 무얼 하지. 해답 없는 질문이 떠올랐다. 다음주 중으로 너를 내 기억 속에서 완전히 뭉개버릴 만큼 매력적이고 운명적인 여자를 만나게 될지도 몰라. 그렇게 생각도 해보았는데, 예수의 재림이랑 확률상 비슷할 것 같아서 금세 체념했다.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네가 없다. 그때의 우리와 지금의 우리, 각도가 틀어진 두 개의 총알처럼 오랜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는 영원히 멀어질 것이라는 생각이 종종 든다. 우리가 함께 보냈던 그 크리스마스와, 함께 먹었던 파기름 볶음밥은 시간이 지날수록 소중해지고, 막을 수 없이 희미해지겠지. 그래. 이정도 페널티는 있어줘야 바람직한 이별일거야. 그렇게 생각하기로 한다. 네가 없어도 아무렇지 않은 크리스마스는 너무 빨리 와도 안 좋을 것 같다. 아마도 내년 이맘 때 쯤에는 나도 다른 사람을 만나고 있지 않을까. 너를 만나지 못한 사람처럼 미래의 누군가와 사랑이란 걸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니 인간의 감정과 사랑이 참 보잘것없다는 생각도 든다.
그건 그렇고 나는 다시 이 주 정도밖에 남지 않은 크리스마스를 미리 떠올리면서 비어있는 스케줄이 난감하다.
정말 무얼 하지. 눈이라도 내리면 큰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