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뢰같은 기억은 밟아도 좋다

'그때의 나'에 대처하는 법

by 서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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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에 대해 무언가 쓸 때마다, 너를 아주 건강하게 보낼 수 있게 되는 것 같아서 요즘 꽤 좋다. 다이어트 하는 사람은 ‘나 안 먹어야지’ 하고 생각해도 몸은 자연스럽게 음식을 떠올리기 때문에 차라리 다른 생각을 하는 게 낫다고 하던데 나도 너를 잊겠다고 다짐했지만 결국엔 그것마저 네 생각이었다는 걸 알았다. ‘잊을거야. 이 정도면 잊었어’ 하는 마음도 결국은 잊지 못한 사람의 생각인 것 같다.


사실 뭐 억지로 잊어야할 필요가 뭐 있냐는 생각도 든다. 시간이 오래 지나면 떠올리고 싶어도 가물가물해서 아쉽지 않을까. 그게 뭐였더라? 그때 뭐 했더라? 어차피 기억하고 싶어도 잊혀지는 순간은 온다. 그래서 차라리 생각날 때마다 그 추억에 집중하다보면 그게 너였고 그게 나였구나. 그땐 그랬구나. 싶기도 하고. 반성도 되고 기념도 되는 것 같다.


얼마 전부터는 네 생각이 나면 그 기억을 한계치까지 디테일하게 떠올려보고는 한다. 그럼 생각보다 세세한 기억은 나지 않게 되는 경우도 많다. 영화를 본 날이면 분명히 같이 영화를 봤던 기억은 나는데, 그게 겨울이었는지 여름이었는지도 정확치 않아서 인터넷에 영화 제목을 검색하고 나서야 그 개봉일을 보고, 아 8월이었군. 하는 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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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이었지. 널 만나기 한참 전에, 내가 대학교 1학년이었을 때 짝사랑하던 친구가 있었다. 대학교 동기였는데 아주 날씬하고, 예쁘고 귀여운 친구였다. 스무 살의 나는 완전히 여자에 관해서는 쑥맥이었기 때문에 지금처럼 능글맞지도, 여유가 넘치지도 않았었다. 그래서 나는 군대가기 전까지 일 년동안이나 지구를 도는 달처럼 그 친구 주위만 맴맴 돌면서 공전을 했다.


12월 4일은 그 친구 생일이었는데, 내가 아직도 이걸 기억하는 건, 여자에게 처음으로 줄 뻔한 생일 선물을 끝내 못 준 날이기 때문이다. 제일 좋아하던 제이슨 므라즈의 앨범을 신촌 레코드점에서 사가지고 겉봉에다가 생일 축하해. 한 마디를 적어놓았다. 그 친구의 생일파티를 갔었는데 뭔가 부끄럽고, 창피해서 결국은 머뭇거리다가 못 줬다.


환불을 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내가 뜯어서 듣지도 않고, 그냥 어영부영 집 어디에 놨는데, 지금은 어디 갔는지 모르겠다. 그냥 내 마음처럼 어딘가를 떠돌다가 어느 순간 연기처럼 사라진 것이다. 내 짝사랑은 그 앨범과 같이 정확히 인지하지 못하는 어느 날 사라졌다.


올해도 12월 4일이 돌아왔다 매년 그 날이면 그 애를 잠깐씩 떠올리고는 했는데, 이제는 그 애에 대한 감정이 정말 타인의 짝사랑을 전해들을 때처럼 무감해졌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그런데 이제 걔는 보고싶지 않은데, ‘그때의 내’가 참 보고싶더라. 바보같이 주위를 맴맴 돌고 마음을 들킬까봐 말도 연습해서 하고... 아무튼 그렇게 순수했던 내가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고 생각하니 더 아쉽고 그립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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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속에서 너의 기억은 정말 불쑥불쑥 튀어나오고 아직도 너와 관련된 수많은 흔적들을 만난다. 나의 핸드폰 이곳저곳에, 컴퓨터 이곳저곳에, 혹은 내 친구들의 사진첩에 아직도 지우지 못한 우리의 발자취들이 남아있었다.

오늘도 아무 생각없이 지도 어플로 뭘 검색하려는데 내가 검색했던 과거의 기록들이 허락도 없이 축 펼쳐졌다.

광화문 수사, 88감자탕이라니

기억은 무례하기도 하지. 허락도 없이 다섯 글자짜리 음식점 이름이 하루를 통째로 떠올리게 한다. 광화문 D타워를 둘러보며 와 이런 데가 생겼네하던 나의 감탄사라든지... 먹을 게 없다는 너의 퉁명스런 말투가 금세 떠오르고, 종로에서 먹었던 그 감자탕이 예고편처럼 스쳐 지나갔다.


비단 지도 어플에서만이 아니었다. 소셜커머스 검색기록에도 너에게 선물을 사기위해 침대에서 뒤적거리던 상품들의 이름이 아직도 남아있고, 핸드폰 메모기록을 한참이나 내리면 너에게 보냈던 사랑시 몇 편이 아직도 남아있다.


그건 정확히 따지면 네가 아니고 ‘그때의 나’지만. 그때의 나는 그때의 네가 있었기 때문에 존재했다. 그러니까 그때의 나와 그때의 너는 동의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의 나’를 나는 보이는 대로 지워버리지만, 그 기억까지 억지로 지울 생각은 없다. 얼마나 지워내고 다른 검색기록들과 섞이면 비로소 그때의 나와 네가 다 사라질까 잠시 궁금했다.


지뢰처럼 남아있는 네가, 어서 내 주변에서 사라지기를 바란다.

사실은 내가 발견하지 못한 채로 교묘하게 한 두 가지는 남아있어도 좋다. 그리고 가능하면 오래오래 숨어 있다가. 예상하지 못한 어느 순간에 툭 하고 튀어나오는 것도 좋겠다.


겨울 코트에서 가끔 발견하게 되는 천원이나 오천원 지폐가 반가운 것처럼


그때의 너와 그때의 나를 아주 오랜만에 발견하게 되면 칫, 하고 콧방귀를 뀌면서도


반갑게 웃을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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