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은 어렵다. 법은 사람이 일일이 만드는 것이므로, 언제나 그만큼의 빈틈이 생긴다. 법은 글자라는 문제도 있다. 말이라는 것은 늘 오해를 불러오고, 세상에는 정의할 수 없는 감정과 상황이 산재해있기 마련이다. 영화 <아이 엠 마더>를 보면 AI인 엄마가 인간인 딸에게 윤리 철학에 대해 가르치는 장면이 나온다. ‘곧 사망할 환자 한명의 장기를 적출하여 아픈 다섯 명을 살릴 수 있다면, 어찌해야 하는가?’ 그 한 명은 장기를 이식해주지 않더라도 몇 주내에 죽게 되고, 지금이 아니면 나중에는 장기까지 망가져서 나머지에게 도움이 될 수도 없다. 한명을 죽이고 다섯 명을 살릴 것인가, 여섯 명 모두를 죽게 내버려둘 것인가.
AI인 엄마는 이렇게 난감한 질문을 던지면서, 논리적인 정답을 요구하지만 딸은 질문으로 대답을 대신한다.
‘이 다섯 명의 환자가 제가 아는 사람인가요?’
‘좋은 사람인가요?’
‘정직한가요, 부정직한가요?’
‘게으른가요? 성실한가요?
그녀는 정직한 한 명의 희생으로 범죄자 다섯을 살린다면 더 많은 사람을 해치게 될 수 있지 않겠느냐고 대답한다.
칼로 무 베듯 명쾌한 질문이 흔하게 있단 말인가. 한 마디 말로 정의할 수 없이, 세상은 무한하게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복잡한 공간이다. 한, 두 가지의 단순한 논리로는 늘 한계가 따른다. 영화 <칠드런 액트>는 법이라는 글자 덩어리에 의존해서 감정의 집합체인 인간의 몸으로, 답을 내야하는 판사를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그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법과 도덕, 종교, 그리고 사랑에 대해서 말한다. 하나의 거대한 질문 같은 이 영화는, 펼쳐지는 난감한 사건만큼이나 단편성과는 거리가 멀다. 이 영화를 법정 영화로 볼 것인가, 사랑 영화로 볼 것인가, 종교 영화로 볼 것인가. 나는 이 세 가지의 기분을 모두 느꼈다.
칠드런 액트(children act)는 아동법을 뜻한다. 제목에서부터 나타나는 것처럼 영화의 사건들도 모두 아동법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영국의 아동법은 19세 미만의 청소년의 경우 개인의 의사보다 그의 복지를 최우선으로 한다는 대원칙이 있다. 주인공인 판사 피오나는 늘 복잡한 선택의 기로에 서 있으나, 이러한 대원칙을 거스르지 않고 소신있게 판결한다. 영화의 시작은 그녀의 샴쌍둥이 판결부터인데 이는 둘 다 죽일 것인가, 분리수술을 강행해서 한명이라도 살릴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그녀는 법의 차갑고도 공리적인 정신을 내세우며 한명이라도 살리겠다는 선택을 하게 된다.
그 사이 워커홀릭인 그녀에게는 남편과의 불화도 강하게 다가오지만, 그에 슬퍼할 겨를 없이 새로운 사건의 판결을 맡는다. 그때부터가 영화의 핵심이 된다.
여호와의 증인인 부모는 교리상의 이유로 백혈병인 아들의 치료에서 수혈을 거부하고 있었다. 아들 또한 자신의 선택인 양 수혈을 거부했다. 병원에서는 치료를 속행하기 위해 소송을 냈다. 종교적인 이유로 수혈을 거부하는 아이를 두고. 피오나는 판결해야 한다. 종교적 신념을 존중할 것인가, 목숨을 살릴 것인가.
영화 속에서 피오나는 나름의 답을 내고, 또 그 답은 뒤에 이어지는 사건들의 단초가 된다. 우리는 영화를 통해 그들의 삶을 경험하면서 자연스럽게 나름대로의 답을 생각해보게 된다. 내가 보기에 영화 <칠드런 액트>는 그 지점에서 아름답다.
무엇이 정답일까요? 묻는 영화가 아니라, 그저 어려워하기만 하면 되는 영화. 법과 신념 사이의 난감함 속에 던져져서는 그저 갈팡질팡하고 어려워하기만 하면 되는 영화다. 우리는 그 고민과 갈등 사이에서 무엇이 옳은가보다 두 가지 선택이 모두 나름대로 의미 있고, 허술하다는 것을 더 절실히 깨달을 수 있다.
아쉬가르 파라디 감독은 좋은 영화는 답을 주는 영화가 아니라, 질문을 던지는 영화라고 그랬다. 그에 걸맞게 <칠드런 액트>는 훌륭하게 질문을 던진다. 나는 두 시간 동안 그녀와 함께 머리를 싸매는 기분에 흠뻑 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