밴더스내치의 시도는 신선하다. 넷플릭스에서 제작한 이 젊은 영화는 관객의 참여를 적극적으로 유도한다. 관객은 일정한 선택지마다 화면 하단에 표시되는 선택지를 직접 골라 스토리에 관여하게 된다. 관객의 선택에 따라 스토리가 달라진다. 글쎄, 달라지는 ‘것처럼’ 보인다.
주인공 스테판 버틀러는 집에 틀어박혀 게임을 만드는 인디 제작자다. 너드의 전형으로, 골방에서 코딩을 하느라 하루를 다 보낸다. 그에게는 어릴 적 트라우마가 있는데, 자신의 잘못 때문에 어머니가 기차 사고로 죽었다는 사실에서 비롯되었다. 버틀러는 급부상하는 게임 제작사의 제안을 받고 크리스마스 출시를 목표로 자신의 게임 개발에 매진한다. ‘밴더스내치’는 그의 게임 제목이기도 하다.(영감을 받은 소설 제목이기도 하고.)
영화와 그가 만든 게임은 비슷한 구조로 되어있다. 어릴 때 ‘게임책’을 모두들 한 번 씩은 해봤을 텐데, 그와 비슷하다. 그런 책들은 주인공의 행동을 독자가 결정할 수 있도록 해 놓았는데 이를 테면 “예->17쪽으로 가시오. 아니오->32쪽으로 가시오.”같은 식이었다. 게이머가 행동을 결정하게 하는 버틀러의 게임처럼, 관객도 영화의 선택지를 고를 수 있다.
영화: <밴더스내치> (2018)
영화의 중요한 메시지는 “선택을 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결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엔딩은 정해져 있고,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그 과정은 달라질 수 있지만 결국 하나의 점으로 모인다는 것. 이는 꽤 흥미로운 문제제기다. 현재의 세상은 하나의 거대한 넛지와도 같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선택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시스템이 기획하고 유도하는 대로 살아간다. 약속이나 한 듯이, 취직을 하고, 결혼을 하고, 개인적인 갈등을 겪으며 살아간다. 그 과정은 저마다 다른 듯해도 큰 틀에서 안정적이다.
“광고 없는 영화를 일 년에 몇 번이나 보시나요?” 잡지 인터뷰에서 한 영화 관계자는 말했다. 우리가 영화를 선택하고 있다는 생각은 착각이라고. 당신은 광고하지 않는 영화를 보러 극장에 찾아가 본 일이 있는가? 인생에 한두 번은 있을지 몰라도 대부분의 관객들은 사소한 포스터나 제목에라도 노출된 영화만을 선택한다. 영화를 아주 좋아하는 사람들도 인디 영화감독의 신작 소식이라든가, 영화잡지나, 영화관에서 발송하는 뉴스레터를 본 이후에나 작은 개봉관을 찾아 다양성 영화를 본다. 일단 극장에 가서, 모르는 감독과 모르는 배우가 나오는 마케팅이 전무한 영화를 골라 보는 일은 극히 드문 일이다.
교통수단의 이용, 문화생활, 음식 메뉴의 선택, 누군가와의 감정적 교류, 진로의 결정 등 세상의 모든 선택과 결정은 ‘밴더스내치’ 같은 사회 시스템의 의도가 아닐까. 영화는 그렇게 말하는 것 같다.
밴더스내치는 그가 취하고 있는 영화적 형식으로 계획되고 구성되었다는 점에서 신선하고 인상적이지만 그리 재미있는 영화는 아니다. 심지어 반복되는 선택이 지루하고 귀찮게 느껴진다. 이는 선택하는 것 같아도 실은 선택하는 게 아니다.라는 핵심을 흥미롭게 구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가장 큰 문제점은 나의 선택이 의미 없다는 사실을 너무 빨리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이다. 선택하는 것 같아도 선택하는 것이 아니려면, 선택 후에 회귀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내가 모든 것을 결정하고 있다고 생각하다가 결말에서 당했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데, 이 영화는 초반부터 잘못된 선택을 채점하듯 알려주고 다시 돌아가게끔 한다. 이 지점에서 관객은 흥미를 잃는다. 정답은 정해져 있고(핵심 엔딩이 5가지라고 하지만 나는 결국 하나의 엔딩이라고 느낀다.), 내가 올바르게 선택하지 않으면 러닝타임이 길어질 뿐이라는 허탈함에 사로잡힌다.
영화: <밴더스내치> (2018)
잘못된 선택을 했어. 하면서 다시 뒤로 돌아가게 할 것이라면, 선택의 필요는 어디에 있는가? 이 지점에서 납득할 수가 없다. "당신의 선택은 이런 결과를 낳는다. 게임 오버. 다시 돌아가시오." 영화적인 게임, 게임스러운 영화를 지향해서 그랬다면 이해정도는 해볼 수 있겠지만 그럴 거라면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 같은 게임을 하는 편이 낫다. 그건 그렇게 끝나도 게임이니까. 영화에 '게임 오버'라니.
나는 이 영화가 미스터 노바디의 성취를 뛰어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역작 ‘미스터 노바디’는 한 인간의 삶에서 중요한 시점으로부터 출발하여 그때부터 생길 수 있는 모든 선택지를 하나로 엮은 이야기다. 이 영화는 처음 볼 때 무척이나 복잡하고 혼란스럽지만, 그 복잡한 서사를 통해 엔트로피의 세계, 선택의 걷잡을 수 없는 파급력 등을 전달한다. 놀랍도록 철학적이고 치밀하다.
미스터 노바디가 선택의 무한한 가능성을 말하고 있다면, 밴더스내치에서는 선택의 무의미함을 역설하는 것이겠지만 적어도 그 발상과 전개는 매우 비슷하다. 그렇다면 어느 쪽이 효과적인가를 고민해 볼 수 있을 텐데, 그중 하나만을 골라야 한다면 나는 미스터 노바디 쪽을 선택하겠다.
“한 권의 책 <마담 보바리>를 읽고 ‘바람피우면 죽는다’는 한 문장의 교훈이나 얻는 다면 그것이야말로 시간 낭비일 것이다”라고 소설가 김영하는 말했다. 한마디의 주제를 위해 작품을 감상하는 것은 위험하고 무의미하다. 우리에게는 소설을 압축하는 하나의 교훈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혼란스러움을 느끼면서 이야기 속에서 헤매는 한동안의 경험과 혼란이 필요하다.
하나의 주제나 교훈을 찾는 독서가 어리석듯이 한 마디의 교훈과 주제를 위해 ‘만들어진’ 영화도 어리석다. <밴더스내치>는 하나의 주제를 위해 역량을 너무 집중했다. 영화사에 하나의 이정표를 세웠다는 점에서 인상적이지만 조금 더 잘 만들 수 있었을 것 같은 아쉬움도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