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시작하자마자 두 번 놀란다. 안와상융기와 코가 크게 발달된 낯선 얼굴에 한 번. 주인공의 성별이 여자라는 사실에 두 번. 티나의 정체성은 대번에 알아차릴 수가 없다. 그런데 그녀의 정체성을 알아차리기 힘든 것은 관객만이 아니다. 티나 그 자신 또한 마찬가지다. 그녀는 못생긴 인간 여자와, 트롤이라는 본 종족 사이의 경계에서 방황한다.
영화: <경계선> (2019)
영화 <엑스맨>에는 두 가지 층위가 있다. 초능력을 가진 자들과, 그들을 제노사이드하려고 하는 인간들의 대결. 그리고 뮤턴트로 은유된 세상의 소수자들, 비주류들에 대한 우화. 첫 번째 층에서 우리가 서사의 진폭이 주는 재미에 매료된다면, 그 다음 단계에서는 비로소 비주류 소수자들에 대한 차별과 폭력에 대한 깊은 고민에 잠기게 된다. <경계선>도 마찬가지, 티나의 정체성찾기 이면에는 인간에 대한 우화가 있다. 인간이 아닌 자로 인간을 바라보려는 시도, “낯설게 하기”다.
영화: <엑스맨2>(2003)
티나와 보레는 자신들을 트롤로 규정한다. 그들은 초감각적인 존재다. 냄새를 비롯한 여러 감각을 통해 주변의 상황은 물론 상대의 내면에까지 다다를 수 있다. 그 능력으로 로드킬을 방지하고, 동물과 소통하고 심지어는 상대가 위험한 사람인지, 범죄를 저질렀는지 까지도 파악한다. 그들은 어쩌면 진화한 인간 같다. 그럼에도 우리가 그들을 닥터스트레인지나 토르, 캡틴아메리카, 멘티스와 같은 초능력 히어로로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야만성 때문이다. 벌거벗은 채로 자연을 누비고, 벌레를 날 것으로 먹는 그 야만성은 그들을 덜 진화된 야만적인 개체인 것처럼 느끼게 한다. 객관적으로는 그들이 인간보다 우월한 능력을 가졌음에도 그렇다.
영화: <경계선> (2019)
경계선에 등장하는 인간들은 모두 야만적이다. 술을 몰래 챙겨서 심사대를 통과하는 것 정도는 우습다. 동거인인 롤랜드는 자신의 아끼는(것처럼 보이는) 개를 투견장에서 사용할 목적으로 키운다. 도시의 곳곳에는 아동포르노를 제작하고, 운반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갓난 아기를 강간하고 살해한다. 티나의 아버지는 딸을 가지고 싶다는 이유로 가족과 분리시켰다. 진짜 야만은 어디에 있나. 인간은 스스로의 야만을 객관적으로 성찰하지 못한다. 관습화된 야만은 당연하다는 듯 용인한다. 그러면서도 인간답지 않은 것들은 손쉽게 야만으로 포장하고, 어떻게든 차별하고 말살하려 한다.
티나는 혼란스럽다. 그녀는 인간의 야만과 동족의 야만을 모두 감지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다. 그녀는 차라리 정체성을 긍정하기로 한다. 벌레를 먹고 벌거벗은 채로 자연을 누비는 야만은 고상하지 않을지언정 처참하지 않다.
호모 사피엔스는 사람속(Homo Genus)에 속하는 종들 중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았다. 단일종으로 명맥을 유지한 비결은 당연히 지능에 있겠지만, 결국 그 지능으로 행한 바는 끊임없는 살육의 역사였다. 그들은 영리한 두뇌로 상대를 이용하고, 죽이고, 빼앗는데 능숙했다. 다른 종뿐만 아니라 같은 종 안에서도 그러했다. 인간의 진화는 끊임없는 잔혹함의 강화라고 봐도 될 것 같다. 아담과 이브의 신화에서 말하는 원죄란 대를 이어 살아남은 야만의 유전자를 뜻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티나는 진짜 트롤일까? 미약하게 살아남은 원시 인류일까? 새롭게 등장한 신인류일까? 알 수 없다. 그녀는 그녀의 고된 삶 속에서, 그 경계선에서 갈팡질팡 하고 있다. 그녀의 존재 앞에서 인간이 야만에서 문명으로 진화했다는 우리의 믿음은 촛불처럼 흔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