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영화 보는 것이 정말 좋다. 영화를 볼 때마다 내가 아닌 누군가가 되는 기분이다. 마치 인생을 수없이 거듭해서 사는 것 같다. 영화는 어떤 이야기 건 2시간으로 압축된다. 30분도 2시간이 되고, 10년도 2시간이 되고, 일생도 2시간이 된다. 영화는 상대성 이론 그 자체다. 시간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보고 싶다면 아무 영화나 틀어보면 된다. 흔히 알려진 것처럼 영화는 시간의 예술이고 우리는 거기에서 시간이 무엇인지 고민할 수도 있다.
주인공들은 나이도 성별도 국적도 제각기 다르지만, 영화 속에서 누구나 나름대로의 갈등을 겪는다. 그리고 해피엔딩이든 새드엔딩이든 그 사건을 어떻게든 이겨낸다. 우리는 각자의 삶에서 상영되는 영화의 주인공이므로, 영화속 인물과 그 처지가 다르지 않다. 결말이 내 마음에 들지 않을 수는 있어도 그건 모두 유일하고 단일하고 굳건한 세계다. 그래서 가치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다.
삶과 영화의 차이라면. 영화의 세계는 언제나 재생과 함께 생생하게 살아나고, 결말로 매듭지어진다는 것이다. 배우들과 이야기는 거기에 남아 수없이 늙지않고 반복될 수 있다. 우리의 삶은 생방송으로 단 한 번만 상영되지만 영화의 세계는 볼 수 있는 한, 한정된 시간안에서 방부처리 된다. 정말 신비하지 않나.
나는 링클레이터 감독의 비포 3부작 비포 선라이즈, 비포 선셋, 비포 미드나잇을 3일에 걸쳐 본 적이 있다. 배우들은 하루에 9년씩 늙었다. 나는 하루에 하루씩 밖에 늙을 수 없는데, 배우들은 하루에 9년씩도 늙을 수 있었다. 나는 절대로 젊어질 수 없지만, 그들은 9년씩 18년씩 젊어질 수도 있었다. 영화의 재미는 가끔 그런 시간축의 어긋남에서도 온다.
작년보다 본 영화가 많이 줄었다. (단편영화가 20편 정도 될 테니 엄밀히 따지면 130편쯤 된다.)아마 내년에는 더 줄 것 같다. 앞으로도 보고 싶은 영화는 산더미로 쌓여있지만 언제 다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올 한해 동안 본 영화들을 정리하면서 한번씩 떠올려봤는데, 어떤 영화들은 내용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 영화 속에 잠겨있었던 2시간은 어디로 간 것일까. 조금 허무했다.
2019년 이래저래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좋은 영화를 많이 볼 수 있었다는 것 만큼은 참 좋았다. 좋은 영화들을 만나는 기분은 늘 새롭게 기쁘다. 2020년에도 영화 많이 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