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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댐 Jul 10. 2019

컴퓨터에는 휴지통이 왜 필요하지

버렸다고 치는 마음

바탕화면을 보면서 늘 의아했다. 컴퓨터에는 휴지통이 왜 필요한 걸까. 휴지통에 뭘 넣는다고 해서 용량이 줄거나, 완전히 사라지는 것도 아닌데. 어린 시절부터 나에게 ‘휴지통’의 존재는 늘 당연했고, 한편으로는 그래서 자주 의아한 존재였다.     


생각해보면 휴지통에 뭘 버린 적도 없다. 컴퓨터를 처음 배운 초등학생 때를 제외하면 지울만한 건 휴지통을 거치지 않고 삭제해왔다. 지금도 나의 휴지통에는 시프트+딜리트를 같이 누르지 못해서 어영부영 휴지통으로 들어간 파일들 뿐이다. 적어도 15년 넘게  ‘일단 휴지통에 버려야겠어.’ 하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오늘은 바탕화면에 너무나 당연하게 서 있는 휴지통을 보면서 문득 새로운 기분에 잠겼다. 열어봤다. 휴지통에는 벌써 6년도 전에 버린 사진 파일들이 꽤나 있었다. 그런데 다시 보니까 지우기엔 아까운 것들이라서 다시 내 폴더에 옮겨 놓았다. 나는 이 사진들을 왜 지우려고 했을까. 그때의 내 의도는 기억에 없으므로, 몹시 궁금했다. 휴지통의 사진들을 다시 꺼내놓으면서 생각했다. 사용하지도 않고, 별 의미도 없어 보이는 휴지통은 컴퓨터답지 않게 참 문학적인 프로그램이 아닌가. 그건 파일을 삭제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열어볼 수도 있게 해 주지도 않지만(휴지통에 있는 파일은 열리지 않는다.) 모든 이가 실수할 수 있다는 것을 의식한 어느 제작자의 걱정스러운 마음이며, 영원히 사라진다는 것의 엄중함을 상기시키는 상징이었던 것이다.      


‘일단 버렸다고 치자.’


휴지통은 그런 말을 나에게 전해왔던 것이 아닐까. ‘일단 버렸다고 쳐. 하지만 영원히 사라지는 것은 되돌릴 수 없으니까, 한 번쯤은 더 생각해 봐. 혹시 실수하지는 않았니? 너 정말 이 사진 지울 거야?’ 휴지통은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나의 실수를 만회해주려고 했구나. 그렇게 해석해보니까 조금 따뜻했다.     


우리의 머릿속에는 휴지통이 없다. 우리는 기억을 삭제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영원히 보관할 수도 없는 존재다. 소중한 기억들은 나날이 흐려지고, 흐려졌으면 하는 아픈 기억들은 뜻하지 않게 생생한 감각으로 되살아난다. 잊으려는 마음은 기억의 복습이 되고, 영원할 것 같아 신경도 쓰지 않던 아름다운 순간들은 어디로 자꾸 숨는다. ‘어릴 때 네가 했던 주옥같은 말들을 적어놨어야 하는데.’ 어머니는 지금도 아쉬운 목소리로 말씀하신다.      


우리에게는 기억을 지우거나 보관할 방법이 없지만, 윈도우 바탕화면의 휴지통을 떠올리면서 이런 마음의 자세를 가져 볼 수도 있다. 일단 버렸다고 치는 것. 일단 지웠다고 치는 것. 사실은 사라지지 않은, 또 사라지지 않을 기억일 수도 있으나 그게 나를 너무 힘들고 아프게 한다면. 임시로 휴지통에 넣어보는 것이다. 그냥 버렸다고 치는 거다.      


그러면 언젠가는 그런 날이 생길 수도 있지 않을까.

지울만한 기억인 줄 알았더니 추억이었네. 지우지 않길 잘했어.        


현재의 나는 늘 어리석고, 과거는 자주 아름답구나. 사진을 폴더로 옮겨 놓으면서, 이 사진들처럼 우리의 기억도 좋은 것 나쁜 것으로 평가하기에는 늘 이를 수 있겠다는 새로운 깨달음을 기쁘게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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