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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댐 Jul 28. 2019

문신한 남자들이 두렵지 않다

- 삶에 관여하는 따뜻한 기억들에 대하여

어릴 때는 슈퍼집 아들로 불렸다. 우리 가족은 방이 딸린 조그마한 구멍가게에서 살면서 장사를 했다. 아버지가 아침 일찍 동대문 시장에서 장사를 하러 가시면 어머니는 슈퍼에서 나를 껴안고 TV를 보면서 이따금 찾아오는 손님들을 맞았다. 여러모로 불편한 집이었지만 나는 그때 그 집에 관한 추억이 많다. (과자도 실컷 먹을 수가 있었다.)


근처에 살던 미용실 아줌마는 친절한 분이셨다. 머리를 공짜로 깎아주셨다. 발달장애 아들을 키우고 계셨는데 그 형은 초등학교 4학년인데도 7살이던 나와 정신연령에 별로 차이가 없어서 자주 놀았다. 텔레토비를 보면서 깔깔대는 형을 보고서 '이 형 되게 유치하네.' 생각할 정도였다.


미용실 아줌마의 남편은 깡패였다. 화려한 용문신이 등을 완전히 덮고 팔뚝까지 이어졌다. 당시 TV에 자주 나오시던 유동근 배우와 많이 닮았다. 나는 드라마에 유동근 씨가 나오면 '엄마! 미용실 아저씨예요!' 하고 소리쳤다.


아저씨는 나를 예뻐했다. 우리 형도 있었는데 형보다 나를 훨씬 예뻐해서 나만 자주 데리고 다녔다. 자신의 친 아들보다도 좋아했던 기억이다. 특별히 고정된 출퇴근 시간이 없던 아저씨는 보이지 않을 때는 몇 주 씩이나 동네에서 모습을 감추기도 하고 때로는 대낮에도 평상에서 소주를 마시다가 낮잠을 자기도 했다. 그야말로 한량 같은 분이었지만 묘하게 동네의 질서와 평화를 유지하는 역할을 했기 때문에 평판은 나쁘지가 않았다.


'우빈이 데리고 목욕탕에 좀 다녀올게요' 불쑥 슈퍼에 찾아와서 이렇게 말씀을 하신 적이 많았다. 나중에 안 사실이었지만 어머니는 그 아저씨에게 나를 맡긴다는 것이 늘 불안했다고 하셨다. 하지만 보통은 거절하는 일 없이 나를 보내주었고 나는 아저씨와 손을 잡고 동네 목욕탕엘 갔다.


아저씨목욕탕에 들어가면 다른 아저씨들이 모두 눈치를 보고 슬금슬금 피했기 때문에 나는 조금 든든했다. 덩달아 강한 사람이 된 것 같아서 으쓱하기도 했다. 내가 조금 산만하게 뛰어다니거나 냉탕에서 첨벙 대도 뭐라 하는 사람이 없어서 좋았다.


아저씨는 나에게 아토피가 있다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에 거친 때수건을 사용하지 않고 부드러운 천 같은 것으로 때를 밀어주셨다. 목욕이 다 끝나고 나면 꼭 문방구 앞에서 슬러시를 사주셨다. 나는 사실 그 슬러시를 먹는 것 때문에 아저씨와의 목욕 나들이를 좋아했다.


사람들에게는 더러 거친 모습을 보이기도 하셨지만 나에게는 아버지보다 훨씬 자상했던 그 아저씨는 나에게 아름답고 따뜻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문신한 사람들을 보면 그때의 아저씨가 자주 떠오른다. 내가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는지 발달장애 아들을 둔 아비의 심정. 그 두려움과 안타까움과 부끄러움(그 아저씨는 조금 부끄러워하셨다.)과 미안함을 때를 밀어주시면서 얘기하곤 하셨는데. 문신 이면의 그 유약한 모습도 같이 떠오르곤 한다.


사람들은 건달처럼 문신한 사람들을 보고 거부감을 느끼고 때로는 무서워하기도 하지만 나는 어쩐지 자꾸 그 미용실 집 아저씨가 떠오르는 바람에. 저 사람도 누군가에게는 얼마나 자상할까. 저 사람은 또 얼마나 유약할까를 먼저 생각해보게 된다. 그렇게 거부감이 들거나 위협적으로 보이지가 않는다.


살다 보면 어릴 때의 기억이 이후의 삶에 얼마나 많이 관여하는지를 자주 실감하게 된다. 뉴스에서 문신한 남자들을 보고 아저씨가 떠올랐고. 목욕탕의 기억도 덩달아 소환됐다. 나에게는 아름답게 관여하는 좋은 기억들이 참 많구나. 새삼스럽게 다시 생각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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