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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댐 Aug 03. 2019

아이스 아메리카노 같은 사람

바람직한 인간상이 아닐까. '아·아'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었다. 이런저런 아르바이트를 다 해보았지만 카페랑은 케미가 맞지 않는 편이었다. 귀찮은 것은 딱 질색인데, 꺼내고 채우고 닦고 따르고 하는 자잘한 일들이 너무 많아서 피곤했다. 결제할 때 포인트가 있으시냐고 일일이 묻는 것도 귀찮았고, 점심시간이면 몰려드는 손님들의 주문을 머신에 줄줄이 붙여놓고 허겁지겁 처리하는 것도 힘들었다.

      

아르바이트를 시작하자마자 제일 먼저 해야 했던 건 레시피를 외우는 일이었다. 매니저 누나가 에이포 용지로 몇 장이나 되는 것을 주고서는 3~4일 안에 다 외우라고 했다. 요거트 스무디에 요거트맛 파우더만 잔뜩 들어가는 거였구나. 카페라떼에 거품 많으면 대충 카푸치노가 되는구나. 휘핑크림을 직접 만드는 거였구나. 잘 몰랐던 정보들을 신기해하면서 열심히 외웠다.     


가장 간단한 음료는 역시 아메리카노였다. 만드는 법은 간단했다. 물과 얼음을 컵에 정해진 선만큼 채워 넣고 나서 갓 뽑은 샷을 털어 넣으면 됐다. 휘저어 섞거나 할 필요도 없었다. 그냥 도르륵 따라서 뚜껑만 덮으면 OK였다. 따뜻한 아메리카노도 그냥 뜨거운 물을 컵에 받아서 에스프레소 샷을 따라 넣으면 됐다.      


시험에 통과하자마자 매니저 누나는 직접 해보라면서 어리바리하는 내 뒤에 섰다. 누나는 손으로 기구들을 가리키면서 사용법을 일러주었다. 그냥 연습이겠거니 하라는 대로 따라서 만들었다. 한 잔의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어렵지 않게 완성되었다.


나는 완성된 커피를 들고 서서 ‘이제 이거 어떡할까요. 제가 마실까요?’ 했는데, ‘네가 왜 마셔? 저기 손님 드려.’하더라. 얼떨결에 처음 만든 커피를 팔아버렸다. 이렇게 대충 만들어서 팔아도 돼요? 묻고 싶었으나 그냥 하라는 대로 했다. 커피 맛이 이게 뭐냐고 화내는 손님을 상상했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마시는 것을 보고 안도했다.    




아르바이트를 하는 내내 나는 모든 손님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켰으면 했다. 눈 감고도 1분도 안돼서 만들 수가 있었다. 간편하게 만들고 간편하게 마시는 Win-Win 커피. 대충 뽑고 대충 따라서 짠하고 내놓으면 손님들도 별 말없이 휘릭 마셔버리는. 프랜차이즈 커피숍의 커피라는 건 딱 그 정도였다. 일하는 내내 아무튼 지겹게 뽑았고, 또 많이 마셨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수없이 만들고, 또 마시면서 그 간단한 레시피의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나에게 어떤 존경심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식사를 마친 후에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홀짝이는 사람들을 보면서. 매력이란 게 이런 걸까. 이 녀석 보통이 아니로구나. 했다.


힌두교 식으로 윤회라는 게 정말 있다면,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부처의 환생이 아닐까 했다. 부처가 아니라도 아무튼 기깔나게 멋지고 쿨한 누군가의 환생임이 분명했다. 지저분하고 멍청한 사람이 아이스 아메리카노로 환생했을 리가 없었다.     


그는 과도한 욕심을 부리지 않고 시원시원하다. 자신을 너무 드러내지 않으면서, 향 하나는 참 그윽하다. 눈치 없이 달달하거나 느끼하지 않고 적당히 쌉쌀하다. 비싸게 굴지도 않는다. 결정적으로 ‘아·아’그는 중독성이 강하다. 치명적인 매력이 아닐 수 없다. 외면하려 해도 자꾸만 생각난다.      




오늘의 나는 모니터 앞에 이렇게 앉아서, 식사를 마친 후의 아이스 아메리카노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만약 내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닮을 수 있다면. 누군가에게 아이스 아메리카노 같은 사람이라면 팔 할은 성공한 사람일 게다. 나는 늘 나 아닌 멋진 누군가를 부러워하는 사람인데, 누군가 하나를 꼭 닮을 수 있다면 고민 없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택하겠다.      


우리는 흔히 깊게 사귀기 좋은 사람을 두고 ‘진국’이라고 말하지만, 요즘 시대라면 사실 “저 사람 참 ‘아·아’지.” 라고 하는 편이 더 칭찬이다. ‘얼죽아’(얼어 죽어도 아이스 아메리카노 or 아이스커피)라는 말도 있지 않나. 당신은 누군가에게 죽어도 택하고 싶은 소중한 사람인가. ‘아·아’는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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