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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댐 Sep 02. 2019

그녀는 없고, 정적이 있는 밤

- 오래된 이별의 감정을 복기하다

어린 시절에는 본 적 없는 동물들이 오히려 흔했다. 코뿔소라든가, 기린이라든가, 펠리컨 같은. 그런 동물들은 대체로 동화나 만화영화에서만 만나볼 수 있었지만 그때의 나는 동화와 만화영화의 세계에 둘러싸여 있었다. 동물들은 오히려 아침마다 출근하는 직장인들이라든가, 새벽시장에서 생선의 값을 매기는 사람들보다 현실적인 존재였다.    

 

나는 막을 수 없게 자라났고, 코뿔소가 없는 세상에 나타난 건 사랑의 상대였다. 그들은 모두 한동안 나에게 비둘기보다 흔한 존재였다. 나는 연애의 대상과 함께 하루의 모든 공백을 모조리 채웠다. 내가 늘 신기했던 건 이별이라는 분수령을 지난 후에 그렇게나 흔한 존재가 유니콘처럼 막연한 존재로 돌변한다는 사실이었다. 이별이 결정된 고작 단 하루를 경계로, 비둘기보다 흔한 존재는 유니콘이 되어 날아갔다.      


코에 있는 뿔 하나로 코뿔소가 된 동물처럼, 그녀는 웃음 하나로 나에게 사랑이 되었다. 코뿔소는 코뿔이 뽑혀도 코뿔소인 것처럼 그녀는 웃지 않아도 사랑이었다.      


세상에는 막을 수 없는 것 투성이다. 우리는 시간을 막을 수 없고, 시간은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 사랑은 시간을 잊게 하고, 시간은 사랑을 잊게 한다고 누가 말했던가. 잔인한 말들은 꼭 틀리지도 않더라. 늘 그렇게 이별이 왔다.


만화영화 같은 장면들이 박제된 밤은 자꾸만 찾아왔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기고, 사랑은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아니, 사실 많은 것을 남겼으나 보통은 원치 않는 것만 남았다. 그러니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셈이었다. 코뿔소도, 너도, 심지어는 고양이 소리나 비둘기도 없구나. 나는 그렇게 중얼거렸던 것 같다.     


오래된 문서 파일을 정리하다가, 오래전 이별 후에 적어둔 메모를 발견했다. 짧은 글이었다. 과거의 내가 처연하고, 안쓰럽고, 귀여웠다. 하지만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아직도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있는 듯이 생생하게 공감도 됐다.     


그즈음의 나에게는 ‘없다’는 사실이 너무 아팠다. 무엇이든 없다고 생각하면 자꾸만 슬퍼졌다. 역시나 막을 수 없는 것은 얼마든지 있었고, 외로움과 슬픔 또한 그러했다.     


그래서 나는 자꾸만 있다고, 있다고 말하는 버릇을 나도 모르게 들였을 것이다. 코뿔소도, 기린도, 그녀도, 아무런 소리도 없는 밤. 나는 무엇이라도 좋으니 있다고 말하고 싶어서 그렇게 적었다. 오늘은 정적이 있는 밤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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