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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댐 Sep 22. 2019

안 내면 진 거 가위바위보

그의 잔머리

몇몇 글에서 밝힌 것처럼 나는 롯데월드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바가 있다. 여러 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해봤지만 놀이공원만의 어떤 도드라지는 특징이 있었는데, 확실히 ‘끼’가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개그맨의 길을 가려고 진지하게 목표하는 사람도 있었고, 타고나게 예능감이라는 게 있거나, 넉살이 좋거나, 말주변이 좋은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많은 편이었다. 이도 저도 아니라면 까불기라도 했다. 개중에는 소심하고 재미가 없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으나 그들에게서도 평균 이상의 ‘끼’에 대한 욕망이 느껴지곤 했다.     


활발함에 관한 ‘끼’가 넘치는 만큼 이성을 유혹하는 ‘끼’도 넘쳤다. 남자가 기본적으로 어떤 부분에 혹하는지를 아는 여자애들을 숱하게 봤다. 웃거나 장난칠 때 때리거나 두드리는 은근한 스킨십에 능하다든가, 엉뚱한 말과 행동으로 4차원을 흉내 낸다든가, 자주 덤벙대는데 그때마다 발을 동동 구르며 과장된 귀여움을 내보인다든가 하는 그런 무언의 전략들이 곳곳에서 빛을 발했다.     


특히 기억나는 어떤 여자애는 이른바 ‘동네북’ 캐릭터였는데, 나는 그 애를 보면서 사실 조금 무서웠다. 왜냐면 그 애는 자존감이 낮거나 무식하거나 허술해서 동네북이 된 것이 아니라, 고도로 훈련된 대인관계 기술로 사람들에게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빈틈을 일부러 드러내고, 그에 반응하는 사람들에게 꿀맛 같은 리액션을 선보이면서 자신과의 커뮤니케이션을 중독시키는 ‘프로’였다. 웃음도 굉장히 헤펐기 때문에 그녀와 썸을 타고 있다고 착각하는 남자애들이 상당히 많았다. 덕분에 그 애는 대단히 예쁜 외모를 가지고 있지 않았는데도 꾸준히 고백을 받았더랬다.     


여자들만 그렇게 모였겠는가, ‘끼’ 있는 남자들도 많았다. 와일드한 피지컬에 귀여움을 장착해서 여자들의 경계를 허문다든가, ‘까칠한 도시남자지만 내 여자에게는 따뜻하겠지’ 같은 컨셉을 잡는다든가, 역시나 은근한 스킨십(머리에 붙은 먼지 떼 주기, 자연스럽게 팔목 잡아끌기 등.)으로 마음을 들었 놨다 한다든가 하는 거였다. 하지만 무엇을 해야 할 지보다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지가 중요한 연애전선에서 남자들은 어딘가 하나씩 허술했다.       


하지만 K는 남달랐다. 그는 ‘끼’로 가득한 놀이공원에서도 도드라지는 ‘끼’의 소유자였다. 나보다 한 살 많은 형이었던 그는 정말 대단한 유혹자였다. 평판이 좋은 것은 물론 수많은 여자들을 만나기도 했다. 아르바이트 내에서도 인기가 많았고, 대학에서도 인기가 많았으며, 밤이면 술집이나 클럽에서도 여자들을 쉽게 만났다. 그에게 사귄다는 건 대단한 이벤트도 아닌 것처럼 보였다.     


그의 전략은 달리 설명할 수도 없다. 여자들에게 가서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아주 자연스럽게, 무심한 듯 장난스러운 듯 말을 거는 것이 다였다. K는 타고난 말재주로 여자가 어떻게 대답하든 절대 당황하지 않고, 자신의 페이스로 은은한 농담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가득한 자존감으로 관계의 주도권을 잃지 않는 아우라가 있었다.


나는 그처럼 능수능란한 말재주를 가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은근히 고민했다. 살면서 매력 있는 사람들을 보면 그들의 장점을 내 나름대로 카피해보려고 했는데, K는 정말 흉내 내고 싶은 유려한 말솜씨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말처럼 쉽지가 않았다. 그냥 유심히 관찰만 했다.


어느 더운 여름날, 오픈조 였던 우리는 교대를 받 ‘어드벤쳐’ 내에 있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다시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야외 ‘매직 아일랜드’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야외로 나오는 무거운 문을 열자마자 숨이 턱 하고 막혀왔다.      


같이 점심을 먹은 인원은 나와 K를 포함해서 다섯 명이었는데 우리는 이런 볕에서 다시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의 괴로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K가 말했다.  

   

“우리 팥빙수 먹을래?”     


시급이 육천 원이었는데 만원도 훨씬 넘는 팥빙수를 사 먹겠다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가 망설이자 K는 가위바위보를 제안했다. 한 명에게 몰아주기를 하자는 것이었다.      


피부가 따가울 정도로 더운 날씨에 우리는 모두 팥빙수가 먹고 싶었다. 금세 설득된 우리는 성이 내려다보이는 브릿지에서 손을 모았다.

가위… 바위…


구령을 외치는 중에 K가 “잠깐만!” 했고 우리는 모두 동작을 멈추고 그를 쳐다봤다.


K는 “가위바위보 지는 것도 서러운데 팥빙수까지 사면 더 억울하니까 우리 이긴 사람이 사는 걸로 하자.” 고 말했다.


사실 진 사람이나 이긴 사람이나 한 명이 남는 건 매한가지니까 모두 그러자고 했다. K는 씽긋 웃으면서 외쳤다.     


“안 내면 진 거 가위바위보!”     


모두 반사적으로 손을 내밀었다. 내가 무엇을 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K가 뒷짐을 지고 아무것도 내질 않았다는 거였다. 나머지는 모두 약간 벙찐 표정으로 '왜 안내?' 했고 K가 대답했다.      


“안 내면 진 건데 나 안 내서 졌어ㅎ 계속해!”     


‘그런 게 어딨어!’라고 생각할 법도 한데, 사실은 모두 무릎을 탁 치고 웃어버렸다. ‘그거 말 되네.’ ‘오케이 인정.’ 그런 분위기였다. 결국 누군가가 걸렸다. 내가 아니라 다행이었다.'이긴' 사람은 울상을 지으며 계산을 했고, 우리는 팥빙수를 도란도란 나눠먹었다. 잔머리라고 해야 할까 사회적 지능이라고 해야 할까. 아무튼 그날 이후로 K를 카피하려는 내 노력은 멈추었다. 어떻게 흉내 내거나 배울 수 없는 타고난 어떤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대단한 끼를 부리지도, 그렇다고 완전 쑥맥인 것도 아닌 채로 놀이공원 아르바이트를 마쳤. K에게서는 유려한 말솜씨의 비법 대신 이렇게 소소한 에피소드 하나만을 얻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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