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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댐 Nov 17. 2019

은는도만뿐, 보조사의 글쓰기

보조사의 철학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 김훈, 「칼의 노래」 -          


김훈이 쓴 소설, ‘칼의 노래’는 위와 같은 문장으로 시작한다. 그는 처음 문장을 쓸 때 이를 “버려진 섬마다 꽃 피었다.”라고 적었다. 그리고 며칠 간의 고민 끝에 보조사 ‘은’을 빼고, 격조사 ‘이’를 넣기로 했다.      


"꽃이 피었다"는 꽃이 핀 물리적 사실을 객관적으로 진술한 언어입니다. "꽃은 피었다"는 꽃이 피었다는 객관적 사실에 그것을 들여다보는 자의 주관적 정서를 섞어 넣은 것이죠. - 이후 출간된「바다의 기별」에서 작가 본인의 말.      


보조사에는 필연적으로 말하는 이의 감정이 담긴다. 격 조사는 있는 사실을 그대로 서술하고, 보조사는 주관을 담는 것이다.      


예를 들어볼까. “나는 밥을 먹었다.” 에는 어떠한 감정도 없다. 그냥 주어가 밥을 먹었을 뿐이다. 반면 “나는 밥만 먹었다.”에는 숨겨진 이야기가 있을 것만 같다. 이 문장은 나는 ‘어떠한 일’이 있어서 다른 ‘어떤 것’은 하지도 못하고 밥만 먹었다는 얘기다. “나는 밥도 먹었다.”도 그렇다. ‘나’는 밥과 함께 다른 것 먹었을 수도 있다. 아니면 밥 먹는 것 말고 다른 일을 했을 수도 있다. “나는 밥은 먹었다”는 ‘어떤 사연’으로 인해 아무것도 하지 못했으나 ‘밥만은 먹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렇듯 보조사에는 언제나 주관적인 감정과 사연이 덧붙는다.     


나는 일상적 글쓰기, 문학적 글쓰기에는 보조사가 더더욱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나의 글에도 습관처럼 보조사가 붙는다. “아팠다.”라고 쓰지 않고 “아프기도 했다.”라고 적는다. “생각했다.”라고도 쓰지만 “생각하기도 했다.”라고 적는다. “그것은 참 나쁘다.”라고 쓰기보다는 “그것은 참 나쁜 것일지도 모른다.”라고 적는다. 보조사에는 자꾸 유예하고, 책임을 회피하는, 그런 자신 없는 감정이 내재되어 있다. 비겁한 글쓰기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그 “확신 없음”과 “단정 지을 수 없음”이 나의 삶과 생각이라고 믿기 때문에 보조사를 놓을 수 없게 된다.     


세상에 단정 지을 수 있는 감정은 얼마나 있을까. 확신을 가지고 분별할 수 있는 사람과 사건은 많지 않은 것 같다. 나는 세상의 많은 일들이 그저 해석에 달려있다고 믿는 편인데, 고정된 실체라는 것이 얼마나 허상에 가까운 지 자주 경험했기 때문이다. 힘들지 않았다고 생각했으나 지나고 보니 아픈 일들도 있었고, 행복했다고 생각했으나 지나고 보면 멍청했던 일들. 혹은 그 반대의 일들이 너무 많아서. 나는 지난 감정은 물론이고 지금의 감정에 대해서도 잘 확신하지 못한다.      


다윗 왕은 보석 세공사에게 명령을 내렸다. 반지를 하나 만들되, 전쟁에 승리했을 때는 겸손할 수 있고, 패배했을 때는 용기가 될 수 있는 글귀를 새기라고 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도 도저히 알맞은 글귀를 떠올릴 수 없었던 세공인은 솔로몬 왕자를 찾아갔다. 솔로몬 왕자는 다음과 같은 글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다윗 왕은 기뻐했다.     


보조사가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싶다. 나는 보조사 속의 지혜가 솔로몬의 글과 비슷한 의미를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언제나 해석의 길을 열어주는 보조사의 아름다움. 보조사만 있다면 불행한 순간마다 행복할 수도 있고, 미래의 밑거름이 될 수도 있고, 생각보다 최악은 아닐 수도 있고, 머지않아 끝날 수도 있는 일이 된다. 보조사 속에는 얼마든지 희망을 담을 수 있으므로.     


나는 앞으로도 보조사의 글쓰기를 놓지 못할 것 같다. 정끝별 시인은 자신의 시 ‘은는이가’에서 “당신은 당신 뒤에 ‘이(가)’를 붙이기 좋아하고 / 나는 내 뒤에 ‘은(는)’을 붙이기 좋아한다”고 썼다. 객관의 세계를 사랑하는 사람과 주관의 세계를 사랑하는 사람. 그의 시는 그 사이의 균열을 잘 표현하고 있다. 나는 이 시를 참 좋아한다.      


그리고 나는 조금 비겁할지라도 이(가) 보다는 은(는)에 가까운 글을 쓰고 싶다. 언어의 사이마다 나의 주관과 사연을 담고 싶다. 때로는 날카롭게 단정 짓더라도 그보다 더 많이 머뭇거리고 싶다. 나의 어두움과 이기심과 추함을 감추고 싶다. 은근슬쩍 솔직하고 싶다. 세상에는 이(가)에서 태어나는 사람도 있고 은(는)에서 태어나는 사람도 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보조사에서 태어난 사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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