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댐 Jan 09. 2020

군대에서 과자 사는 법

군대에서 배운 유용한 지식

사람들에게 함부로 군대 얘기하지 말라고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군대 얘기를 좋아한다. 전역 무렵 만났던 전 여자 친구는 사귄 지 2년이 다돼가도록 틈만 나면 군대 얘기를 하는 나에게 “그래서 오빠 전역 언제 할 건데?” 웃으면서 물어본 적도 있다.


나는 나의 군대 얘기가 “객관적으로” 재미있다고 생각해서 한다. 나는 자기 객관화가 좀 되는 사람이라서, 내가 하는 이야깃거리도 나름대로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가 있는 편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나의 군대 얘기는 들을만하다. 그래서인지 얘기를 듣는 사람들도 모두 재미있어했다. (오로지 나의 기분일 뿐이지만ㅎㅎㅎ)


그러니까 오늘도 군대 얘기다. (군대 얘기를 싫어하실까 봐 밑밥을 좀 깔았다.)

군대에서 보낸 2년 동안 의도했건 그렇지 않건 다양한 것들을 배웠다. 이제와서는 아무 소용도 없는 ‘송탄, 장전, 잠김, 격발, 추출, 방출, 공이치기’ 총이 발사되는 원리 8단계라든지, 크레모아의 살상 반경 같은 것들이 사실은 대부분이지만 이후의 삶에서 유용하게 사용되는 지식들 몇 가지 남았다. 군대에서 과자 사는 법도 그중 하나다. 나의 소소한 꿀팁인데 공개하고자 한다.


군대에서 전역하고 몇 년이 지나고서야 깨달은 것이지만. 군생활했던 모두가 참 어렸다. 군대는 고작 스무 살 스물 한 살짜리들의 세계였다. 어린 시절에는 군인 아저씨라는 호칭이 참 익숙했는데, 깨닫고 보니 그들은 아직 대학생활에도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 미숙한 존재였다. 그 어린 친구들을 모아놓고 계급을 나누고, 온갖 불합리한 일들을 처리하게 하니 다양한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던 것이었다. 수없이 많은 부조리는 그 폭력적 시스템과 미숙함의 충돌에서 발생했을 것이다. 심부름부터 여러 제한들, 폭언들...


과자 심부름은 가벼운 부조리에 불과했지만 상당히 귀찮았다. 선임들은 1층에 있는 PX까지 간식을 사러 가기 귀찮아해서, 자주 카드를 던져주며 과자를 사 오게끔 했다. 이등병이던 나는 과자 심부름을 처음 받았을 때 “과자 어떤 걸로 드시겠습니까?”하고 물었는데 선임들은 꼭 “그냥 네다섯 개 사와. 아무거나.” 하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나는 정말 ‘아무거나’ 네다섯 개를 사 갔는데 꼭 한 두 명은 그렇게 불평을 했다.


“아 왜 이거 사 왔어?!”


대답을 제대로 해줄 것이지, 아무거나 사 오라더니. 그럴 때마다 분한 마음을 억지로 누르며 난감하게 웃어넘길 수밖에 없었다.


과자 심부름은 이후로도 이어졌다. 몇몇 선임의 기호를 외울 수 있었지만 심부름을 시키는 주체들이 워낙 다양했기 때문에 언제나 고생한 보람도 없이 잔소리를 듣곤 했다. 가끔 잔소리를 듣기 싫은 날이면 “어떤 거 사 오면 되겠습니까?” 하고 집요하게 물었으나 선임들은 끝내 과자의 종류를 얘기해주지 않고 “서댐아. 그건 너의 센스야.” 같은 얄미운 대답만 했다.


난감한 표정으로 PX에 내려가던 차에 일병이던 선임 하나를 만났다. 선임은 어디를 가느냐고 물었고, 나는 상 병장들 과자 심부름을 간다고 대답했다. 그는 자기도 PX 가는 길이라면서 같이 가자고 했다. 나름 똘똘해서 평판이 좋았던 선임이었다.


PX에서 과자를 고를 때 내가 늘 느끼던 난감함을 선임에게 토로했다. 어떤 과자를 사야 욕을 먹지 않을지 모르겠다고. 나름 스트레스였는데 선임은 별것도 아니라는 듯이 내 질문에 명쾌하게 답했다. “과자 사는 거? 졸라 쉬워. 무조건 이렇게 사면돼.”


그의 이어진 대답은 이랬다.


“과자를 하나만 사야 한다? 그러면 보통 어떤 거 사 오라고 말해주니까 패스. 아무거나 두 개를 사 오라고 한다? 짠 거 하나 단거 하나. 세 개 사 오라고 한다? 초코 하나 짠 거 하나 감자 하나. 네 개 사 오라고 한다? 짠 거 하나 단거 하나 초코 하나 감자 하나. 이렇게 사갔는데도 뭐라고 하는 사람 있으면 정신병자니까 야삽으로 대가리 찍어.”

“대가리 말씀이십니까?”

“생각만 하라고 ㅋㅋ”


그날부터는 일병 선임의 조언대로 과자를 샀다. 2개: 짠 거  하나 단거 하나. 3개: 짠 거 하나 초코 하나 감자 하나. 4개: 짠 거 하나 단거 하나 초코 하나 감자 하나. 그래도 뭐라 하면 야삽으로 대가리 찍는(상상만 한)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 방법 굉장히 철학적이다.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최선으로 궁리하고 그래도 안 되면 상대를 마음 편히 증오하라는!


전역하고 과자를 살 일이 있을 때마다 나는 그때 선임의 조언을 여전히 참고한다. 그리고 아직도 그 선임의 말투와 표정이 생각나서 웃기다. 생각해보면 과자 사는 법을 알려준 선임은 그때 고작 스물한 살이었을 뿐인데, 그 어린 나이에 그런 지혜는 어디에서 나왔을까. 그는 아마 지금도 잘 살고 있을 거다.


과자 살 일이 있다면 위의 원칙을 기억하라. 네 개 이상 살 때는 짠 거 하나 단 거 하나 초코 하나 감자 하나다. 저렇게 사갔는데도 투정을 부리는 사람이 있다면 야삽으로 대가리 찍는 상상을 하라. 내가 군대에서 배운 가장 유용한 지식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이별이 아프지 않아서 아팠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