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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댐 Feb 13. 2020

여행에 의미부여는 없을수록 좋다

- 어쩌다 잠깐 여행론

여행에 거창한 의미부여는 없을수록 좋다. 열흘 쯤 모은 돈을 탈탈 털어 비싼 한 끼 식사를 하는 것이나, 한 두달 쯤 돈을 모아 해외로 떠나는 것이나 별 다를 게 없다. 그런 여행에 자꾸 의미부여를 한다면 남는 것은 <비포선라이즈>와 같은 우연적 낭만이 아니라 교통사고와 같은 실망일것이다.      


인생에서 교통사고는 적을수록 좋은 법, 의미부여도 없을수록 좋다. 의미를 부여하면 기대하게 되는데 이 기대는 클수록 쉽게 배반된다. 우리의 여행은 모험이 아니라, 관광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관광은 소비고, 모험은 도전이다. 김찬삼 아저씨는 해외여행이 합법화되지 않던 시절에 배를 타고 세계를 누볐다. 류시화 작가는 한국이라는 나라를 설명할 수조차 없을 때 인도를 여행했다. <비포선라이즈>의 제시는 사랑에 빠진 여자와 모텔갈 돈도 없이 기차여행 중이었다.(얼굴이 에단호크였지만). 낭만적 여행을 지향하는 사람들은 그런 여행을 꿈꾸면서도 호텔 예약에 공을 들인다. 보통 적당한 불편만을 선호한다.      


여행이 낭만적인 것이 아니라 낭만을 추구하는 자에게 낭만이 온다. 여행은 놀이의 한 방식에 불과하다. 비싼 음식점에서의 외식과 별 다를 것이 없다. 두 세 달 동안 돈을 벌어서 일주일의 여행에 쏟아 붓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건 내가 보기에 그저 하나의 라이프스타일일 뿐이다. 여행이 거의 미덕이 된 오늘날의 분위기에서 ‘여행 하지 않음’은 ‘낭만 없음’이라든가 ‘문화인으로서의 결격사유’ 정도로 치부되기도 하는데, 그럴 필요가 있을까.


사람들은 왜 자꾸 떠나고, 떠날 것을 권하고, 여행을 이토록 찬미하는 걸까. 그건 여행이 주는 압도적 행복감 때문이겠지만, 그 즐거움은 실상 조삼모사급 사기에 가깝다. 1년에 평균 2285시간을 일하는 한국인들의 노동시간은 OECD 국가 중 압도적 1위다. 우리는 거의 일이라는 양념에 절여진 신김치와 같다. 만성 두통과 요통은 직장(독대)에서 거의 부패와 흡사하게 발효된다. 그러다가 여행을 가면 일과 직장은 월급처럼 소멸한다. 일상적 고통은 순식간에 막연해진다. 그 말은 우리가 굳이 세부나 브뤼헤로 가지 않더라도 완벽하고 안락한 분리만 제공된다면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다는 뜻이다. 여행의 힘이라기보다는 분리의 힘인 것. 호캉스라는 말장난스러운 놀이문화가 번성하는 이유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된다.     


노는 건 원래 재밌는 것이다. 돈을 쓰는 것도 즐겁다. 그런데 대부분의 여행에는 돈쓰기와 놀기가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마젤란의 신항로 개척과, 어니스트 셰클턴의 탐험도 모두 여행의 형식이었으나 그들은 놀지도, 돈을 쓰지도 않았다. 우리는 여행을 모험으로 포장하고 싶어하면서도 그런 여행을 떠나려 하지는 않는다. 로빈슨 크루소의 삶을 한 번쯤 부러워는 하지만 무인도에 스마트폰이 없다는 사실이 그 상상에서 깨어나도록 뺨을 후린다.     


여행을 떠나지 않는 이들에게 강요와 같은 잔소리를 하는 사람들은 곳곳에서 발견된다. 떠나라, 떠나라고 외친다. 그 누구보다 행복하다고 온몸으로 전시하듯 과장하는 쏘오셜 네트워크의 세상에서 여행하지 않고 꿋꿋하기에는그래서 꽤나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      


내가 만났던 여자친구 중 하나는 고등학교 때부터 존경스러울 정도로 돈을 열심히 모아서 자주 여행을 떠났다. 머리가 아주 좋지도, 심각하게 예쁘지도, 예술적 감각이 화려하지도 않았던 그녀는(하지만 아주 매력적인 그녀였다.) 자신의 존재감을 여행에서 찾았다. 즐거워서 여행하기도 했지만 여행을 하는 자신의 모습이 필요해보였다. 그녀의 여행과 행복은 자주 과장됐다. 그녀가 일주일에 7일씩 몇 달이나 알바를 해서 한 달의 여행에 돈을 쏟아부을 때, 나는 매일 조금씩 맛있는 것을 사먹고, 영화를 보고, 마사지를 받거나 책을 사며 행복했다. 그녀가 어리석다거나 내가 현명하다는 것이 아니라 한 번 쯤은 행복해지는 데에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는 것에 골똘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여행에 의미부여는 없을수록 좋다. 관광을 하면서 모험을 하는 사람인양 거들먹거릴 필요도, 어떻게든 낭만을 찾겠다고 두리번거릴 필요도, 무엇인가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어오겠다고 어깨에 힘을 줄 필요도, 상처를 회복한다거나 힐링을 한다거나 머리를 완전히 비워오겠다고 각오할 필요도 없다. 우리가 하루의 어느 시간을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 영화관을 찾듯이 그냥 외식을 하는 기분으로 떠나면 그만이다.   

   

1월에는 다낭을 다녀왔다. 그곳에서 나는 맛있는 음식을 먹고, 매일 마사지를 받고, 클럽에 가서 소심하게 춤을 추고, 놀이기구를 타고, 아경을 보고, 같이 간 후배와 이야기를 나누고, 영상통화를 하고, 여유와 행복에 젖어 몸을 부르르 떨다가. "여행이라 즐거운 걸까, 그냥 돈쓰고 놀아서 즐거운 걸까" 가만한 자세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지난 여행에서 비포선라이즈 흉내를 내느라, 류시화 흉내를 내느라, 지도 밖으로 행군하는 척 하느라 얼마나 많은 기력을 소모했었는지 기억해냈다. 더이상 까불지 않고, 과장하지도 자조하지도 않기로 했다.


열흘 쯤 모은 돈을 탈탈 털어 한 끼 식사를 하는 기분으로. 그저 나를 대접한다는 마음으로 여행 하기로 다짐했다. 어느 한편으로는 여전히 '하하호호' 관광 말고 마젤란, 오디세우스, 김찬삼과 같은 모험을 해보겠다는 다짐을 마음속 어디엔가 남겨 둔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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