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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댐 Feb 17. 2020

진상보다 무서운 '진상썰'

-  우리는 모두가 복잡하게 나쁜 사람들

“그대가 오랫동안 심연을 들여다 볼 때, 심연 역시 그대를 들여다본다.”

- 니체


*


하루 종일 스마트폰을 쥐고 틈만 나면 들여다보며, 인터넷의 바다에서 헤엄치며 산다. 어느 순간부터는 화장실에 핸드폰을 들고 가지 않아도 불안하고, 목욕탕에서도 핸드폰이 없으니까 허전하고 지루한 상태가 지속돼서 조금 걱정했다. 주변에 이런 걱정을 나눴더니 그 사람들도 나와 별반 다르지 않아서, 그냥 요즘 사람들이 다들 그렇게 사나보다 안심했다.


스마트폰에 잠식되어 살아가는 와중, 인터넷의 수많은 정보들을 수용하면서도 내가 그 무엇보다 적극적인 자세로 절대 하지 않으려 하는 단 한 가지가 있다. 혐오를 조장하는 ‘썰’들을 절대 읽지 않는 것이다.


“일 하면서 만난 진상 썰.jpg”같은 것이나, 네이트 판에서 주로 등장하는 “시어머니가...” “며느리가...” “시누이가...” “예비신랑이...” “예비신부가...” 같은 가정사 얘기들, “여자친구가...”, “남자친구가...” 로 시작해서 연인의 단점만 실컷 써놓고는 “제가 비정상인가요?”식의 질문으로 마무리하는 글들(객관적인 평가를 요청하는 ‘척’하는) 나는 이렇게 혐오에 대한 글은 절대 읽지 않는다. 1초만에 슥 훑어버리고는 금방 도망친다. 이 방면에 대한 나의 신념은 정말로 확고하다.


벌써 몇 년째 그런 글들을 읽은 바가 없지만 과거의 기억을 되살려보면 끝내 남은 것은 분노  뿐이었다. 타인의 편집된 경험들은 범인간적 혐오를 부추겼다. 충분히 적절한 상황에서 누군가 조언을 해 줄 때에도 “어? 이 사람 꼰대네?” 생각하게 되고, 식사를 하고 계산을 누가 할지 잠깐 고민하게 되는 순간에도,(그런 애매하고 어색한 상황은 늘상 있을 수 있는 일임에도.) “어라, 이 여자 혹시?” 생각하게 되고, 서비스직 알바를 할 때 손님이 조금만 불만을 표시해도 “진상.” 한 마디로 단정 짓게 됐다.


나는 세상에 맥락도 없이 처참한 사람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 진상을 만나본 적이 없었던 것이 아니다. 나는 아르바이트를 20개는 넘게 해보았고, 그 중 대부분은 서비스직이었다.)


콜센터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을 때는 감정적으로 끔찍한 상태였다. 나는 잘못한 게 없는데, 다들 나에게만 짜증을 냈다. ‘정상적’인 문의는 없고 온통 투정과, 불만과, 억지요구 뿐이었다. 나뿐만 아니라 동료들도 지쳤고, 일하다보면 요란한 소리와 함께 헤드셋을 던지고 사무실을 뛰쳐나가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떤 고객의 불만 건을 하염없이 듣는데, 신기하게도 그날따라 너무 공감이 됐다. 그 고객의 사연이 특별해서가 아니라 단지 그날 나의 기분 상태가 조금 좋았던 것 같다. “아 진짜 기분 나쁠 만하셨네.”로 시작한 그 한 통의 전화 이후, 나는 모든 이들이 짜증을 내고 억지 요구를 할 때마다. 이 사람은 도대체 “왜” 화가 났는가를 생각했다. 그 전까지는 모두 억지요구를 하는 진상이라고 생각했던 수십 통의 전화가 모두 그럴만한 사연으로 들리기 시작했다. 반사회적인 또라이의 이유 없는 분노가 아니라 ‘맥락’이라는 게 있는 분노였다. 정상참작이 불가능한 진상의 수는 십 분의 일로 줄었다. 상대의 입장 따위는 고려하지 않으려 했던 나의 이기심이 나 스스로를 좀먹고 있었구나. 죄지은 것처럼 부끄러웠다. '왜?' 라는 질문 하나로 상대가 진상에서 피해자로 바뀔때 온 몸이 잠시 찌릿했다. 그때부터 세상의 많은 일들은 그저 해석하기 나름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타인은 단순하게 나쁜 사람이고 나는 복잡하게 좋은 사람인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대체로 복잡하게 나쁜 사람이다.”

신형철, <정확한 사랑의 실험> 中


나는 인터넷에서 혐오를 조장하는 많은 썰 들이 상당 부분(사실은 거의 대부분) 왜곡되었다고 믿는다. 그런 일화들에서 항상 필자는 복잡하게 좋은 사람이고 타인은 단순하게 나쁜 사람이다. 그렇게 악의적이고, 자기중심적으로 편집된 글들은 읽는 이에게도 타인을 왜곡된 시선으로 바라보게 세뇌한다.


꼰대에 대한 글을 읽으면 실제로 내 주변에 꼰대가 늘어난다. 이기적인 친구에 대한 글을 읽으면 내 주변에 이기적인 친구가 늘어난다. 처참한 남자에 대한 글을 보면 모든 남자가 바람 피는 남자 같아 보이고, 다 성매매를 할 것 같아 보인다. 이른바 ‘김치녀’에 대한 글을 읽으면 주변의 모든 여자들이 주체성도 없고 무식하고 세속적이고 방탕하고 이기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건 그런 사람들이 갑자기 많아지는 것도, 갑자기 사람 보는 눈이 생긴 것도 아니다. 그가 자신의 세계를 부정적으로 편집한 결과다. (남을 바라보는 냉철한 시선으로 자신의 모습도 한 번 쯤 돌아보면 좋을 텐데.)


공장에서 생산되는 기성품에 불량률이라는 게 있듯,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사회에도 불량품이 있다. 불운은 누구에게나 종종 따르지만, 우리의 삶에는 배신자보다 조력자가 많고, 택배는 대체로 멀쩡하게 오지 않나. 멀쩡한 제품을 괜히 두드리고, 던지고, 돋보기로 살펴서 불량품으로 만드는 것은 제품의 문제가 아니라 본인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구름처럼 모인 사람들이 실체 없는 가공의 진상들을 욕하는 모습을 보면 씁쓸할 뿐 달리 할 말이 없다.
 

첫 줄에서 인용한 것처럼 니체는 ‘심연을 들여다 볼 때, 심연도 자신을 들여다본다’고 말했다. 나는 이 말을 ‘하늘을 보는 자는 별을 보고, 낭떠러지를 보는 자에게는 심연만 보인다’는 말로 변형하고 싶다.


은 늘 하늘에 있고, 낭떠러지 깊은 곳에는 늘 심연이 있다. 무엇을 볼지 선택은 자신의 판단에 달렸지만 이왕 하나를 봐야한다면 별을 보는 편이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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