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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댐 Feb 22. 2020

글을 썼는데 몽타주가 되었다

- 브런치를 들키고 깨닫는 나의 글쓰기

드라마의 남자 주인공은 몹시 난처한 표정으로 여자 주인공을 쳐다본다. 그녀의 눈에는 당장이라도 흘러내릴 듯한 눈물이 맺혀있다. 남자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고, 그에게 어떤 것도 기대할 수 없다는 확신이 들었을 때, 그녀는 차가운 말을 뱉으며 돌아선다. 남자는 그녀의 어깨를 잡아채고 말한다.  "너답지 않게 왜 그래?!"


이쯤에서 나는 속으로 "설마... 설마..." 한다. 왜냐하면 그녀가 뱉을 다음 대사가 이미 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아마 악에 받힌 표정으로, 혹은 서러운 표정으로 외칠 것이다.


"나답지 않게? 나다운 게 뭔데?!"



나다운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나답다. 너답다는 말을 흔히 사용하면서도, 사실 내가 누군지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솔직히 말하면 크게 관심 있는 것 같지도 않다. 우리는 보통 스스로를 잘 알고 있다고'가정'하고 살아간다. '나'를 안다는 것은 매우 힘들고 피곤하며 한편으로는 두려운 과정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피곤한 과정을 생략하고 살다가 일기장을 들춰보듯 드문드문 낯선 자신과 대면한다. 일기장에 적힌 과거가 낯설 듯, 의식하지 못했던 자신도 낯설다.


김국환이 부른 타타타의 유명한 가사 '네가 나를 모르는데 난들 너를 알겠느냐'는 '내가 나를 모르는데~ 넌들 나를 알겠느냐'로 들리기도 한다. 그게 더 자연스럽다. 내가 나를 아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가.


나도 잘 모르는 나를 대면하기 위한 방법으로 '20답법'이라는 게 있다. 방법은 매우 간단하다. 그냥 '나는~이다.'라는 형식의 문장을 각기 다른 내용으로 20개 적는 것이다. 그냥 말만 되면 되니까 내용은 어떤 것이든 상관없다. 얼핏 쉬워 보이지만 막상 하려고 보면 20개를 채우기 은근히 막막하고 까다롭다.


처음에는 나는 남자다. 나는 00살이다. 나는 서울에 산다. 등과 같은 대답을 적게 된다. 10개를 적기 전에 더 이상 무엇을 써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고, 검사는 이때부터가 진짜다. 자신의 내면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20번에 가까워질수록 자신도 몰랐던 내밀하고 잠재적인 면이 드러난다. 20번 대의 답은 사람에 따라서는 '나는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싶다'가 될 수도 있고, '나는 00의 아빠다.'가 될 수도 있고, '나는 우유니 사막에 가 본 적이 있다.'가 될 수도 있다. 각자 자신이 생각하는 중요한 정체성이다.


브런치에 200개의 글을 쓴 건 나도 모르는 새 진행했던 200답법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같이 일하는 동료에게 '이별하고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어요.' '브런치에 써요.' '아이디요? 그건 알려줄 수 없어요.' 정도를 말했을 뿐인데 10분이 되지 않아 나를 찾았다.


그녀의 방법은 심플했다. 브런치 검색창에 이별을 검색하고는 아이디를 무작정 눌러서 글목록을 살핀 것이 다였다. 마우스를 휙휙 내려가며 내 아이디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그 사람이 나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어 김 씨라는데요? 콜센터 아르바이트에, 영화 리뷰 쓰고, 노래도 만들고... 맞네 맞네-!


그러고 보니 내 글 목록에는 나의 거의 모든 중요한 정보가 다 어있었다. 연애관, 이름, 취향, 철학, 경험, 추억, 전공, 가족관계, 성장배경, 생각, 건강이나 감정상태 등. 내가 썼던 글들 속에는 내가 그대로 녹아있었다. 어찌 보면 너무 당연한 얘기지만 나는 그 점이 너무 낯설게만 느껴졌다.


그건 내가 스스로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나서 쓴 것이 아니라, 쓰고 보니 이게 나였다는 기분에 가깝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나에 대해서 썼다기보다는 글쓰기 자체가 나를 알아가는 과정이었던 것 같다. 뻔한 생각인가. 나는 분명히 무엇인가 쓰고 싶어서 썼는데, 그게 나도 모르는 나였다니 충분히 놀랄만하지 않나.


자전적 글쓰기는 자신이 강의하는 자신과, 자신에 대해서 필기하는 자신이 겹치는 순간의 경험이다.

그렇게 완성된 수많은 글은 아마도 자신이 기대하고 바라는 자신이 아니라, 부끄럽고 쑥스러워 밝히기도 민망한 자신에 가까울 것이다.


기성작가의 에세이를 한 권 읽거나, 브런치에서 한 작가의 글을 꾸준히 보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는 그 사람의 친구보다 내가 그 사람을 잘 알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음, 이 사람의 방어기제는 이런 것 같고, 사실 이런 쪽에 관심이 많고, 화법을 보아서는 성격이 그런 쪽에 가깝고, 이런 불만을 가지고 있고, 이런 스트레스에 약하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주민등록번호나 핸드폰 번호만큼이나 중요하고 고유한 정보들을 너무 많이 드러낸 것 같다. 글을 다 모으면 나라는 사람이 뚝딱 지어질 것 같다는 생각이다. 글쓰기란 이리도 무서운 것이었구나. 노출증 환자처럼 있는 그대로의 나를 드러내 보이고, 관음증 환자처럼 남을 훔쳐보는 브런치가 무슨 정신병동 같다는 생각도 든다.


"나답지 않게? 나다운데 뭔데?!"를 외치는 여배우의 대사는 참 낯부끄럽게 진부하지만 글쓰기에 있어서는 매우 중요한 질문 같다. 나는 일단 나답게 적고, 지난 글들을 읽으며 나를 학습한다.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기억들, 생각의 방향들이 어디로 향해 있는지를 따져본다.


왜 맨날 아르바이트 얘기에, 군대 얘기에, 비슷비슷한 결론의 철학에, 사랑 얘기냐. 내가 늘상 적는 것들과 건드리지도 못하는 것들을 알아차리면 뜨끔뜨끔한다. 그렇게 쌓여온 글들과 반영된 나를 낯설게 바라본다. 분명 내 얼굴인데 부정하고 싶은 몽타주같다. 아무거나 그렸는데 나와 너무 닮아서 신기한 초상화 같다. 그런 모습 모두를 언제나 같은 마음으로 사랑할 수는 없지만, 어쩔 수 없으니 그러려니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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