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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댐 Mar 08. 2020

‘느린 빠른’은 서른일까 아닐까

나의 2020년



군대에 그런 농담이 있다. 신병이 새로 전입와서 선임이 나이를 물었는데, 이렇게 대답하는 거다.


“제가 원래 ㅁㅁ년생이긴 한데 ‘빠른’입니다.”

그걸 들은 선임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뛰어.”
“예?”
 “뛰라고 새꺄. 얼마나 빠른지 한 번 보게. 어쭈 안 뛰어?”     




나는 빠른이긴 한데 빠른이 아닌 독특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학교를 한해 일찍 들어갔는데 생일은 5월이다. 당시에 조기입학 제도가 있어서 생일이 조금 늦어도 입학을 할 수가 있었고, 동네에 1,2월생의 ‘진짜 빠른 년생’ 친구들이 많았다. 동네에서 같이 술래잡기하던 동갑내기 친구들이 다 학교에 간다고 하니까 나도 덩달아 가게 된 것이었다. 혼자 안 가기에도 좀 그랬고, 가기에도 좀 그랬지만. 어머니 말로는 어릴 때 워낙 영특해서 문제없이 적응할 줄 아셨다고 한다.(말만 잘했는데, 어릴 때 말 잘하니까 나머지에도 다 똑똑한 줄 아셨다.)      


집안의 기대와 달리 학교에서 좀 뒤쳐졌다. 키가 작으니까 운동도 좀 못하는 축이었고, 수학은 제대로 따라가지를 못했다. 담임선생님이 집에 전화도 하셨다.     


“서댐이가 영 수학을 못하네요. 집에서 각별한 지도를 좀 부탁드립니다.”     


그날 이후 엄마에게 두들겨 맞아가면서 수학경시대회를 준비했고, 그 해 100점을 맞아 금상을 타긴 했는데, 매의 효과가 사라지자마자 이후로는 수학 성적이 늘 바닥을 쳤다. 중학교 때부터는 수학을 이해해서 풀어본 기억도 없다. 이런 얘기를 하려고 한 건 아닌데. 아무튼 결론은 내가 느린 생일의 빠른 년생이라는 것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내 나이를 아는 친구들이 없었다. 나이는 나의 큰 콤플렉스였다. 나는 생일에 관련된 일이 있을 때마다 엄청난 공포에 휩싸였다. 수련회 가기 전 여행자 보험을 들어야 한다고 주민등록번호를 적으라고 하는데 종이 하나에 적고 다음 사람한테 넘기는 식이라서 화장실 가는 척, 할 거 있는 척, 버티고 버티다가 마지막에야 후딱 적고 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생일을 사수하기 위한 치열하고 아픈 기억들. 떠올리면 슬프다. 몇 번 들통난 적이 있었는데 친구들이 엄청 놀려대서 상처를 많이 받았다.     


스무 살이 되니까 또 난감했다. 고등학생 때까지는 학년이 같으면 친구하면 됐는데, 한 살 많은 재수생에, 동갑인 후배에... 학번으로 해결되지 않는 애매한 나이들이 많아서 입장을 정리하느라고 애를 썼다. 입학 동기들과는 친구를 먹고, 후배들에게는 어찌저찌 형, 오빠 대접을 받기로 했고, 그 외 애매한 족보하고는 데면데면 지내는 것으로 얼추 매듭을 지었다.     


나는 나름대로 상식적인 사람이라서, 학교를 벗어나서까지 빠른 년생을 주장하지는 않았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한테 “나이는 같지만 제가 학교는 먼저 다녔으니 형 대접 좀 해주시죠.” 하는 그런 뻔뻔한 말은 도무지 안 나왔다. 학번이 같아도, 학교 다닌 시기가 정확히 일치해도 밖에서 만나면 “형.”, “누나.” 했다. 그게 맞으니까. 같은 학년으로 학교를 다녔으니 형, 누나 대접하는 게 억울하다며 학교 바깥에서도 ‘빠른’을 고집하는 사람들을 보면 한심해보였다.     


아르바이트를 할 때 굉장히 분노한 적이 있었다. 나와 같은 나이의 빠른 년생을 만났는데, 출생년도로 해도 같은 년도. 학번으로 해도 같은 학번임에도 자꾸 자기가 형이라고 했다.


“나는 빠른이니까 너보다 형이지. 5월이 무슨 빠른이냐?”

“무슨 기준으로 너만 빠른을 적용하는 건데?”


나이로 해도 동갑이고, 학번으로 해도 동갑인데, 자기는 ‘진짜 빠른’이니까 나이를 올리고, 나는 ‘가짜 빠른’이니까 머물러야한다는 거였다. 논리가 전혀 없었는데도 굽히지를 않아서 엄청 싸웠었다. 결국은 친구를 하기로 했는데, 아니 이게 무슨 친구야. 남보다도 못하지. 동갑을 친구라고 부르는 우리나라의 문화가 아주 비정상적이라는 생각을 그때 하게 됐다.
 

아무튼 나는 ‘느린 빠른’ 년생으로 살아왔고, 또 살아가고 있다. 한국에서 오랫동안 생활한 어떤 중국인이 쓴 글에 공감한 적이 있다. 내용인즉 ‘한국에서는 한 살만 많아도 조상 급의 대우를 한다.’는 거였다. 한국에서 한 살이라는 격차의 의미는 생각보다 크다. 호칭부터 완전 달라지고, 호칭에서 반영되는 마음가짐이나 태도도 달라진다. 언어는 우리의 정신까지 지배하는 법이라서 말이 편해지면 행동도 편해지고, 호칭 상 위아래가 생기면 관계 속에서의 에너지도 달라진다. 목숨 걸 일까지는 아니라도 웃어넘길 일만도 아니라는 것을 자주 체감했다.     


편의상 ‘빠른’을 적용한 대학교 학과와 동아리 활동을 제외하면 오롯이 내 나이로 살았는데, 나의 반쪽의 삶은 여전히 ‘빠른’의 삶이므로. 나는 서른 같으면서도 서른 같지 않은 나이를 체감하며 2020년을 보내고 있다. 친구들은 서른이 되었고, 그래서 나도 서른인 것 같은데, 하지만 나는 스물아홉이기는 해서. 서른임을 실감하기에는 찝찝하고, 그렇다고 서른이 아니라고 하기에도 찝찝한 상태다.     


이마저도 나의 정체성인데 어쩌리. 사람이라면 모두 각자가 타고난 어떤 운명이 있다고 생각한다. 고유하게 처한 상황이라는 게 있다. 내 사촌동생이 강씨 성을 타고나서 매년 학기 초만 되면 자기소개를 첫 번째로 해야 했던 것처럼. 나에게도 우연하게 ‘느린 빠른’이라는 운명이 주어졌다. 전세계 유일하게 한국의 어느 시기에만 존재했던 ‘빠른’의 운명에 더해, 조기입학을 장려하는 가정통신문을 형이 학교에서 받아와 엄마에게 건네주었던, 특히 동네에 대다수 친구들이 ‘진짜 빠른’이었던, 하필 생일이 5월이어서 어물쩡 입학 할만 했던, 그런 나의 운명.       

나의 문제없는 5월 생일은 ‘빠른’ 년생이라는 운명을 안고 무언가 돌연변이같이 되어서, 나의 성격 형성과 갖가지 사건들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왔다.


2020년이 되고 나서 나는 다시 한번 나의 이 '느린 빠른' 운명을 실감하고 혼란을 겪고 있다. 그러니까 나는 서른일까 아닐까. 나는 ‘빠른’일까 ‘느린’일까. 나는 연병장을 빠르게 뛰어야 할까. 느리게 뛰어야 할까.    

  

무거운 발놀림으로 헐떡이며, ‘느린 빠른’ 속도로 연병장을 뛰는 나의 모습을 떠올린다. 그게 빠른 건지 느린 건지.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여전히 모르겠다. 어쩔 수 없는 나의 일부라는 것만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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