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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댐 Mar 23. 2020

그러니까 나의 봄은

봄의 어떤 기억

* 2010년


대학교 1학년 첫학기. 4월을 앞두고 창으로는 봄이 쏟아지고 있었다. 교수님은 10분 늦게 들어오셨는데 들어오시자 마자 출석도 부르지 않으시고, 한마디도 안하시고, 그냥 아련한 표정으로 창가에 서서 밖을 바라보고 계셨다. 그러거나 말거나 시끌시끌하던 강의실이 일시에 조용해지고, 교수님은 여전히 한마디도 안하시고. 분위기는 어딘가 민망해졌다. 화가 나신 걸까. 그냥 가만히 서 있는 그에게 시선을 두고 우리는 계속 눈치를 보고 있었다.


"날씨가 참 좋네요. 나가서 수업합시다."


우물쭈물하는 우리를 두고 교수님은 인문대와 자연대 사이의 잔디밭으로 나가셨다. 우리는 교수님을 가운데 두고 둥그렇게 풀밭에 앉았다. '각자 가장 재미있게 읽은 소설을 하나씩 말해보세요.' 돌아가면서 우리는 책 이름을 댔고, 나는 박민규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를 소개하면서, '엄청 못생긴 여자를 잘생긴 남자가 사랑하는 이야기입니다.'같이 멋없는 요약을 했다.


수업은 금방 끝났다. 다음 수업까지 시간이 널럴하게 남아서 친구들과 주변을 걸었고, 말은 안했지만 나는 이게 대학의 낭만인가 하면서 잔뜩 신이 났다. 봄의 어떤 기억. 


* 2012년


그 해 이맘때 쯤. 갑자기 눈이 내렸다. 펑펑 내렸다. 우리는 아침을 먹고 복귀해서 오전 일과를 진행하기 전에 잠깐의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4월을 앞두고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무거운 눈송이들이 보이지도 않는 하늘의 천장에서 꿀렁꿀렁 떨어지고 있었다. 선임들은 "씨발!" 거칠게 욕을 해댔고, 전입온지 얼마 안된 신병들은 눈치없이 낯이 환해졌고, 나는 입으로는 "씨발!"을 내뱉었지만 내심 좋아하고 있었다.


오전 일과가 잠시 미뤄지고 TV를 보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이놈의 눈이 그치지를 않았다. 금방 연병장과 기동로에 가득 쌓였다. 금방 그치고 봄빛에 녹겠지. 그런 생각들이 수포로 돌아가자 부소대장이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생활관으로 들어왔다.


"연장 챙겨!"


습관처럼 짜증섞인 목소리로(하지만 장난스럽게) 명령했고, 나는 그가 던져준 창고키를 공중에서 리듬있게 낚아채서 눈삽이나 빗자루같은 것들을 꺼내러 갔다. 온통 찌푸린 얼굴로 중대원들이 모두 막사 앞에 모여서 각자 도구를 챙기고 능숙하게 눈을 쓸기 시작했다. 입에서 입김을 내며 표정없이 눈을 쓸다가 짓궂은 선임 하나가 다른 선임을 눈더미 속에 파묻었다. 파묻힌 선임도 파묻은 선임을 넘어뜨렸다. 삽시간에 선임들은 서로를 쫒아다녔고, 눈을 뭉쳐 던지기 시작했고, 나도 덩달아 신이나서 동기들과 눈을 던지면서 놀았다.


그러다 눈 하나를 뭉쳐서 친구를 맞추려던 것이 선임에게로 날아갔다. 다행히 선임의 오른쪽 허벅지에 맞았는데, 나한테만 다행이었고 선임은 무척 열이 받았다. 구석으로 가서 30분이나 욕을 먹었다. '미쳤냐?' '죄송합니다.' '죄송할 짓을 왜해?'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하지 마라.' '죄... 잘못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하지마라 뒤진다.' '아...' '아?... 미쳤냐?'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하지 말랬지. 맞선임 불러와.'


이런식으로 30분동안 열심히 혼이 났다.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같은 말 못하게 하고 혼내는 거 당하는 입장에서 너무 난처해서 나중에 나도 후임 갈굴때 참 많이 써먹었다. 아무튼 봄의 어떤 기억.


* 2014년


4월 중순 벚꽃이 피었다. 롯데월드 매직아일랜드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비처럼 벚꽃잎이 떨어졌다. 야외라서 바람도 딱 기분좋게 불었다. 사람들이 엄청 많이 놀러왔고, 연인들도 많았는데 나도 그때 예쁜 여자친구와 연애중이어서 하나도 부럽지가 않았다. 일하다가 쉬는시간에 여자친구와 몰래 기계실이나 창고같은 곳에서 키스도 하고, 아무렇지 않게 휴게실로 들어갔다. 동료들이 "야 너네 왜 늦게 들어오냐. 어디서 뽀뽀하고 왔냐?" 그렇게 놀렸는데 속으로 '뽀뽀 아니고 키스했지롱' 하면서 속으로 뿌듯했다.


"자 쓰리투원 외치고 출발합니다. 쓰리 투!"


투!에 올리는게 재밌었다. 갑자기 출발시키면 사람들은 소리를 꺅 질렀다. 번지드롭은 순식간에 허공으로 솟구치고 잠시 후에 내려온 사람들의 표정은 기분좋은 울상이었다. "석촌호수 벚꽃이 가장 잘보이는 곳으로 다시 한 번 올라갑니다!" 그렇게 신나서 멘트를 했다. 사람들도 즐거워 했다.


퇴근하고 옷을 갈아입고 락커룸 앞에서 여자친구를 기다렸다. 여자친구는 키도 크고 날씬해서 멀리서부터 걸어오는 모습이 엄청 예뻤다. 나는 헤실헤실 웃으면서 그녀에게 손을 흔들었다. 나보고 귀엽다고 했다. 같이 일한 동료들과 손을 흔들며 헤어지고 나서 여자친구와 석촌호수를 한바퀴 걸었다. 벚꽃나무 중간중간 가로등이 일정하게 있어서 운치있게 빛났다. 손잡고 걷는 기분이 너무 좋았다. 너무 좋았다. 봄의 어떤 기억.     




오늘은 날씨가 봄 같아서 봄 생각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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