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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댐 Apr 05. 2020

우리는 영화 같은 삶을 꿈꾸지만

- 영화, <카이로의 붉은 장미>

웨이트리스로 일하는 세실리아는 폭력적인 남편에게 눌려 살면서 직장에서도 실수 연발이다. 그녀의 낙이라면 동네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는 것. 그녀는 사장에게 혼나면서도 일하는 내내 지난 주 상영한 영화에 대해서 떠들며 행복해한다, 퇴근 후 영화관에 가자며 남편을 조르지만 한량처럼 놀면서 바람이나 피우는 그는 영화에 별 관심이 없다. 세실리아는 혼자서 간다. 그리고 새로 걸린 영화 <카이로의 붉은 장미>에 푹 빠져서 그 영화를 몇 번이나 관람한다. 다섯 번째로 영화를 보러 간 날 스크린의 ‘톰 벡스터’가 세실리아에게 말을 걸며 스크린 바깥으로 걸어 나온다. 그녀의 손을 잡고 극장을 뛰쳐나간다.   

  

영화: 카이로의 붉은 장미(1985)


극 중 인물이 스크린 바깥으로 걸어 나와서 여주인공을 데리고 극장 바깥으로 나간다니. <카이로의 붉은 장미>에서는 영화 속 세계와 현실 세계를 그대로 이어버다. 영사기를 통해 스크린에 비춰지는 나머지 인물들은 실시간으로 상영되며 현실의 사람들과 소통한다. 톰 벡스터는 영화 속 모습 그대로 현실의 공간을 활주한다. 세실리아와 이곳저곳을 거닐며 데이트도 한다. (심각하게 말이 안 되는 영화적 상상력에 헛웃음이 나오지만 사랑스러울 따름이다.)      


영화: 카이로의 붉은 장미(1985)


톰 벡스터는 영화 속 캐릭터 그대로 낭만적인 남자다. 영화 속에서와 같이 달달한 멘트를 연발하고, 철학적이고 이상적인 이야기만 하며 세실리아에게 헌신과 사랑을 한결같이 약속한다. 세실리아는 그런 면에 사르르 녹는 한 편 어딘가 균열을 느끼기도 한다. 영화 속의 언어와 삶의 방식은 현실에서 어딘가 어색하게 느껴진다.   

  

영화: 카이로의 붉은 장미(1985)


<카이로의 붉은 장미>는 극중 인물을 현실에 그대로 옮겨 놓으면서 영화와 현실의 괴리를 나타낸다. 편집된 세계에서의 낭만은 우리의 시간축에서 통하지 않는다. 우리는 매일같이 여행이나 모험을 할 수도 없고, 목숨을 건 열정적인 사랑을 할 수도 없다. 우리의 삶은 영화와 비교해서 한참이나 길고 그 대부분은 밋밋한 일상이다. 하지만 그런 일상이 있어야만 축제도 즐길 수 있는 법이다. 우리는 모두 영화 같은 삶을 꿈꾸지만, 그것이 현실에서 불가능하리라는 것 또한 더없이 잘 알고 있다.      


<비포 선라이즈>의 주인공들은 아름다운 젊음의 순간에 도시를 떠돌며 낭만적인 사랑을 하고, <맘마미아>의 주인공들은 지중해 아름다운 섬에서 춤을 추지만 우리가 그런 현실과 영화의 괴리 속에서 절망감보다는 위로와 즐거움을 느끼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영화 속에서 온갖 화려하고 화목한 장면들이 나타나더라도, 그것은 현실의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제거한 가공품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영화는 배우와 극중 인물의 관계도 조망한다. ‘톰 벡스터’역을 소화해낸 ‘길 셰퍼드’는 영화 속에서 ‘톰 벡스터’를 연기한 배우이다. 그러니까 ‘톰 벡스터’는 ‘길 셰퍼드’ 자신의 모습과 같다. 그런데 느닷없이 ‘톰 벡스터’가 현실로 튀어나온 바람에 현실세계(영화 속에서의 현실세계)에는 ‘길 셰퍼드’가 두 명이 된 것처럼 되어 버렸다.      

영화: 카이로의 붉은 장미(1985)

재미있는 것은 ‘길 셰퍼드’는 ‘톰 벡스터’를 ‘가공된 존재’, ‘자신의 작업물’이라고 생각한 반면, ‘톰 벡스터’는 자신을 독립적인 주체로 생각한다는 데에 있다.      


실제로 극중 인물은 배우와 자주 동일시된다. 사람들이 드라마 <도깨비>의 어느 장면을 설명하면서 “공유가... 김고은을...”같은 말을 하는 건 전혀 이상하게 보이지 않는다. 극중 인물들이 드라마라는 세계 속에서만 존재하는 인물일지라도 우리는 그 가공의 이야기속에서 배우의 존재를 완전히 지워내지 못한다. 이는 배우를 극중 인물처럼 멋지고 아름답게 느끼게도 하지만 마찬가지의 이유로 동일시되며 현실에서 욕을 먹게도 한다. 만일 드라마 속에서 낭만적이고 지적인 배우가 현실에서는 무식하고 여자를 갈아치우는 양아치일지라도 그것을 우리는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영화: 카이로의 붉은 장미(1985)

<카이로의 붉은 장미>에서는 인물과 배우를 완전히 분리해야 한다고 말한다. 극중 인물은 완전히 가공된 완전히 새로운 별개의 독립체라는 것이다.     

‘세실리아’는 ‘톰 벡스터’와 ‘길 셰퍼드’ 모두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지만 결국 ‘길 셰퍼드’를 선택하기로 한다. 영화 속에서 완벽한 남자 ‘톰 벡스터’는 반칙이 난무하는 현실에서는 어울리지 않는 존재라는 걸 깨닫는다.    

    

시네필(Cinephile)이라는 말이 있다. 프랑스어로 영화광이라는 뜻이다. 세상에는 시네필과, 시네필이 아닌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시네필과 잠재적인 시네필로 가득하다. 우리는 모두 영화에 매료될 준비가 되어있다. 영화를 아주 싫어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조차 좋은 영화에 한 두 번쯤은 마음을 빼앗겨본 경험이 있다.

      

시네필이거나 잠재적인 시네필인 우리들은 영화를 어떻게 대해야 하고, 영화는 우리 삶에서 무엇이어야 하는가. <카이로의 붉은 장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영화는 지극히 생생해서 도무지 가공된 것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아야 하며 우리의 팍팍한 삶 속에서 때로는 도피처가 되어주어야 하지만 그것이 현실과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고. 삶과 영화는 완전히 분리될 때 아름답고, 우리는 스위치를 켜고 끄듯, 그 사이를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이다.      

영화: 카이로의 붉은 장미(1985)

극중에서는 문을 닫은 황량한 놀이공원에서 ‘세실리아’와 ‘톰 벡스터’가 데이트하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비수기라 운영하지 않는 놀이공원은 황량하기 그지 없지만, ‘세실리아’는 곧 여름이 되면 시끌벅적 화려해질 것이라고 말한다. 사람으로 가득찬 성수기의 놀이공원이 결코 우리의 집이 될 수는 없지만, 짧은 순간 온갖 환상을 맛보게 해주기 때문에 사랑스럽듯. 영화도 그런 것이라고 넌지시 일러주는, <카이로의 붉은 장미>는 우디 앨런의 다정한 영화론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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