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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댐 May 24. 2020

낙관인가 비관인가

-영화, <더 플랫폼>

어린이를 위한 그림책 「지구가 100명의 마을이라면」은 68억 명이 사는 지구를 100명이 사는 마을로 바꾸어 상상하면서 우리의 현실을 셈한다. 이 계산에 따르면 지구마을의 100명 중 20명은 영양실조이고 1명은 굶어 죽기 직전인데 15명은 비만에 해당한다. 이 마을의 모든 부 가운데 6명이 전체의 59퍼센트를 가졌으며 그들은 모두 미국 사람이다. 74명이 39퍼센트를 차지하고, 남은 2퍼센트를 20명이 나누고 있다.     

영화: 더 플랫폼(2019)

<더 플랫폼>의 스토리는 단순하다. 주인공 ‘고렝’이 감금된 수용소는 한 층에 두 명씩 사는 방이 수직으로 되어 있는데, 그 위치가 랜덤으로 배정된다. 최상층인 0층에서 엘리베이터를 통해 음식이 내려오는데, 아래층 사람들은 위층 사람들이 남긴 것을 먹어야 한다. 그렇게 한 달을 버텨야 한다. 다음 달이 되면 위치는 다시 랜덤 하게 바뀐다.      


영화는 ‘고렝’이 위아래를 왔다 갔다 하면서 때로는 처절하게 굶고, 때로는 넉넉하게 먹는 장면들을 보여준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더 플랫폼>은 수직으로 솟은 설국열차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영화에서든, 현실에서든 모두가 자신의 몫 이상을 욕심내지 않는다면 굶거나 죽는 사람이 없을 텐데, 시스템은 그렇게 아름답게 설계되어 있지 않다. 소수가 누리고, 대다수는 빌어먹는다. 지구마을에서 100명 중 1명이 굶어 죽기 직전인데도 15명은 비만인 것처럼. 6명이 절반 이상을 소유하고, 고작 2퍼센트를 20명이 나눠 가지고 있는 것처럼. 영화는 가상의 수용소를 통해 현실을 꽤나 노골적으로 비유한다.     


‘고렝’은 시스템을 파괴하고자 한다. 처음에는 조금 순진무구한 방법을 택했다. ‘인간다움’에 의지한 것이다. 가운데 열린 통로를 통해 각자의 것을 조금 내려놓자고 말한다. 하지만 온건한 설득은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 “음식을 남기지 않으면 내가 똥을 쌀 거야!” 설득은 그런 유치한 협박만도 못했다. 그래서 그는 직접 나서기로 한다. 직접 엘리베이터에 탑승해서 음식을 분배하고 최대한 많은 사람을 살림과 동시에, 최상층에 이 시스템이 얼마나 부조리한지를 알리려고 한 것이다.     

영화: 더 플랫폼(2019)

이 지점에서 나는 소설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을 떠올렸다. 소설 속 오멜라스는 이상적인 도시다. 그곳은 부유하고, 안전하고, 쾌적하며, 평화로운 도시로 모든 시민들이 행복과 번영 속에서 살아간다. 하지만 이 유토피아에는 한 가지 맹점이 있다. 이 모든 복지를 위해서는 단 한 명의 아이가, 어둡고 좁고 축축하고 자신의 배설물로 가득한 지저분한 방에서 온갖 상처와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놀라운 것은 이 도시의 모든 시민들이 이 아이의 존재를 알고 있다는 점이다. 아이의 억압이 도시의 행복을 지탱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지만 그들은 이를 외면하며 살아간다.      


<더 플랫폼>에서도 마찬가지다. 이 수용소 속의 모든 이들은 알고 있다. 자신이 풍족하게 먹으면 누군가가 굶어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하지만 그들은 자신이 이 시스템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저 자신의 위치에서 최대한 많은 것을 누리려 애쓴다.   

  

이처럼 최적화된 시스템은 악(惡)보다 악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도 마찬가지로 그렇게 악하고 잔인한 시스템 속에서 살고 있다. ‘오멜라스’나 <더 플랫폼>의 그들과 같이 불편한 것들을 외면하며 살아간다. 우리는 개발도상국의 수많은 아이들이 굶어 죽어간다는 것을 알고, 아마존의 무수한 나무들이 베어지는 것을 알고, 공리주의라는 미명 하에 자행되는 수많은 폭력들을 알지만, 이를 해결하기보다는 우리의 윤택한 삶을 유지하는 쪽을 택한다. 그것은 우리가 인간다움을 잃어서가 아니라,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무력감 때문이다.      


현재 우리는 많은 물건을 실제로 손에 넣을 수는 있지만, 그런 물건들의 제조와 유통 과정이 어떠한지는 전혀 상상할 수 없다. 이런 소외 과정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경이, 감사, 죄책감을 경험할 수많은 기회를 박탈당한다.     


어쩌면 알면서도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 모르는 것일 수도 있다. 알랭 드 보통의 말처럼 시스템에 대한 무지도 문제다. 그것은 성찰의 기회마저 빼앗는다. 봉준호 감독은 도축 시설에서 동물들이 잔인하게 도살되는 장면들을 본 이후로 한동안 고기를 먹지 못했다고 하는데 나는 그게 대단한 감수성 때문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닭들이 주렁주렁 매달려서 차례차례 절단되고, 최종적으로 갈갈이 분쇄되는 모습을 본다면 누구도 맥너겟을 마음 편히 먹을 수는 없을 것이다. 시스템은 인간을 잔인하게 만들지만 잔인함과 격리된 채 살아가게도 한다. 정보의 단절 속에 인간들은 본인이 잔인한지 조차 알 길이 없다.      


그러니까 시스템은 공고하고 빈틈없는 모양으로 이를 무너뜨릴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원천 차단하는 한편 그 잔인함마저 철저히 감추면서 우리들의 생활을 떠받치고 있는 것이다.      

영화: 더 플랫폼(2019)

우리에게는 두 가지의 선택지가 있다. 시스템에 순응하거나 이를 전복시키는 것. 앞서 말한 것처럼 ‘고렝’은 후자다. 그는 시스템을 바꾸려는 자다. 그가 ‘돈키호테’를 읽는다는 것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망상에 빠져 허상을 쫓는 돈키호테의 어리석음은 일반적으로 조롱의 대상이지만 영화에서는 오히려 그 어리석음의 필요를 역설하는 것이다. 그가 온갖 곤경과 수모를 겪어가며 최하층을 향해 내려갈 때, 피와 상처로 범벅된 얼굴은 흡사 예수를 연상케 하는데, 이 또한 어리석어 보이는 한 명의 의인을 암시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시스템을 바꿀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말하는 것일까. <더 플랫폼>은 언뜻 “시스템을 바꾸는 것은 최소한 한 명의 용기다”라고 말하는 것 같지만, 아리송한 결말이 보여주는 것처럼 스스로도 그 말을 확신하지 못했다. 영화 <남한산성>에서 오랑캐에게 항복할 수 없다는 상헌의 말을 반박하는 명길의 대사, “상헌의 말은 지극히 의로우나 그것은 말에 지나지 않사옵니다.”를 이 영화의 어설픈 메시지에 대고 읊고 싶었다.     


나는 옥상달빛의 노래 <염소 4만 원> 들으며 <더 플랫폼>을 봤을 때처럼 어긋난 마음을 느낀 적이 있다.


너희들은 염소가 얼만지 아니/아프리카에선 염소 한 마리/4만 원이래/하루에 커피 한잔 줄이면/한 달에 염소가 네 마리/한 달에 옷 한 벌 안 사면/여기선 염소가 댓 마리/지구의 반대편 친구들에게/선물하자/아프리카에선 염소 덕분에/학교 간단다/지구의 반대편 친구들에게/선물하자/아프리카에선 염소 덕분에/학교 간단다/학교 보내자     


자, 그래서 우리가 커피를 줄이고, 옷 한 벌을 안 사서 염소를 보내면, 이 세상은 바뀌는가. 그보다 먼저, 염소를 보내기는 하는가. 시스템은 여전히 수많은 이들을 착취하는데, 착취당하는 일부가 착취당하는 일부를 구원하는 것이 진정한 해결책이 될 수 있을까. 염소 한 마리를 보내서 죄책감을 씻으려는 것은 자위에 가깝지 않나.     

영화: 더 플랫폼(2019)

소설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의 결말은 이렇다. 누군가는 시스템을 바꾸는 것을 포기하는 대신, 그 번영과 평화의 도시를 떠나기로 한다. 또 한 명이 떠나고,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차마 자신의 행복을 위해 누군가를 착취한다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유토피아를 떠나버린다. 소설은 시스템을 바꿀 수 있다고 말하지 않고, 혜택을 거부하는 쪽이 차라리 희망이라고 말한다. 나는 이쪽이 그나마 마음에 든다. 누릴 것을 누리면서 염소를 보내어 어설픈 위안을 삼는 것보다 훨씬 낫지 않나. <더 플랫폼>은 낙관인가 비관인가. 나는 비관이기를 바란다. 영화가 말하려는 것이 ‘소수의 용기가 시스템을 갈아엎을 수 있다’는 메시지라면 나는 그저 낯간지럽다고 생각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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