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 인간은 농사를 짓기 전에 더 행복했다. 영양분을 더 고르게 섭취했고, 남편은 가사와 육아에 더 많이 참여했으며, 가족구성원 모두가 시간을 더 다양하고 활기차게 사용했다. 기아와 질병의 위험도 낮았다. 하지만 인간이 어느 순간 농업을 시작하면서부터, 그 모든 것들이 조금씩 망가지기 시작했다. 수면시간이 대폭 줄어들었지만 노동량은 끔찍할 정도로 늘어났고. 탄수화물 위주의 단순한 식단은 건강을 갉아먹었다. 잉여생산량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지만 어찌된 일인지 계급이 뚜렷하게 생겨났고, 소출을 소수가 독점했다. 그 결과 대부분의 삶은 불행해졌다.
영화:비바리움(2019)
수렵·채집하던 인간들은 적은 수의 무리를 이루며 자연 속에서 행복하게(다만 조금 불안하게) 살 수도 있었다. 하지만 어딘가에 ‘무엇’을 심으면 ‘무엇’이 자라나고, 그리하여 조금 덜 불안하게 식량을 생산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챈 순간, 그것이 늪인지도 모르고 빠져들고 말았다. 정착이 수고로움을 잉태한 것이다. <비바리움>은 정착하기 위해 애쓰는 현대인의 삶을 거대한 은유로 완성했다. 지금 이순간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인간의 거대한 역사이기도 하다.
유치원 교사로 일하는 ‘젬마’와 정원사 ‘톰’은 집이 필요하다. 그들에게는 별로 시간이 없다. 주택 가격이 하루가 다르게 상승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집을 구하는 일에 매진한다. 함께 찾아간 주택중개소에서 만난 중개인 ‘마틴’은 어쩐지 꺼림칙하지만 설득력은 있다. 그가 소개하는 주거단지는 ‘욘더’라는 곳인데, 똑같이 생긴 집들이 비엔나소시지처럼 줄줄이 늘어서 있는 마을이다. 마을 초입의 슬로건 “가장 완벽한 안식처가 되어줄 거에요, 영원히”는 꽤나 따뜻하게 보이지만, 곧 모두에게 섬뜩하게 다가오는 말이 된다.
영화:비바리움(2019)
그들은 ‘욘더’에 기약 없이 갇히게 된다. 식량은 박스로 알지 못하는 사이 배달되고, 그들은 매일 똑같은 음식을 먹을 수밖에 없다. 톰은 흙이 수상하다. 탈출을 위해 무작정 땅을 파기 시작한다. 매일매일 흙을 파내려간다. 젬마는 세탁기를 돌리고, 밥을 차리고, 청소를 한다. 그렇다. 이건 농업혁명으로 꼼짝없이 정착의 늪에 빠진 인간이자, 현대인의 고단한 삶이다. ‘욘더’에 갇힌 그들은 탈출하려 애쓰지만, 일단은 눌러앉아 살기로 하는데 그들에게 ‘아기’가 배달되었기 때문이다. 그 아이를 키워야만 나갈 수 있다고 하니까. 그 동물도, 인간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꺼림칙한 아이를 반강제로 키우게 된다.
이 시스템은 현대인을 어떻게 정착하게 만드는가? <비바리움>은 터무니 없이 비싼 ‘집’과, ‘아이’로 이를 설명한다. 영화 속 주인공들이 ‘욘더’에 갇혀 살아가는 것과 우리가 대출을 끼고 집을 사서 수십 년간 갚아나가는 것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삶이 그 ‘집’에 묶이기 때문이다. 그 대출을 해결하지 않고서는 그 공간에서 벗어날 수 없다. 기가 막히게 운이 좋아 집값이 계속 오르거나, 집을 증여 받은 사람들을 제외하면, 모두 그런 삶을 살아가게 된다. 또한 ‘아이’가 생겨도 사람은 보통 정착하게 된다. 육아에 드는 비용이 적지 않아 안정적인 수입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아이의 교육 문제로라도 섣불리 이사를 결정할 수가 없다. 그렇게 아이가 자랄 때까지 잠시만 살아보자던 각오는 생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정신없이 집과 육아를 해결하다보면 어느새 남는 것은 늙고 병든 몸이다.
영화:비바리움(2019)
영화 속에서 불시에 배달된 ‘아이’는 어째서 사랑과 보살핌의 대상이 아닌 채로 표현되었을까? 그건 이 작품이 가족이라는 개념을 시스템의 산물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김대중 대통령이 즐겨 사용했던 ‘정치는 생물이다’라는 말은 비단 정치뿐만 아니라, 사회, 시장, 국가에도 해당한다. 국가도 지구촌 어디에서 영속적으로 존재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하고 살길을 찾아 나서는 생물과 같다. 국가의 유지를 위해서 국민은 필수적이며, 그들에게 안정적으로 세금을 걷는 일도 필요하다. 다른 나라로 도망가지 않도록 잘 가둬두어야 한다. 대부분의 나라들은 일부일처의 ‘가족’이라는 시스템을 설계함으로써 이를 해결했다. 그들이 쉽게 끊어낼 수 없는 관계로 이어지게 만들고, 그 사이에 자식을 두게끔 하면 사람이 정착하기 마련이라는 것을 국가는 잘 알고 있다. 그들이 정착하면 세금은 안정적으로 걷힌다. 그런 원리를 바탕으로 시스템은 만들어졌다. (가족이 만들어진 개념이라는 것은 이혼율만 봐도 쉽게 증명된다. 현대적인 의미의 ‘결혼’은 인간의 본성에 별로 맞지 않는다.)
현실에서 아기는 마땅히 사랑받아야 할 존재지만, 국가와 시스템이 유도한 생산물이기도 하다. 그들은 자라서 다시 ‘욘더’(시스템)를 공급하는 시스템의 부품이 된다. 자가발전으로 전기를 만들어내는 괴이한 모양의 발전기처럼 이 세상은 존재한다. 어떤 간사한 사람들이, 수많은 사람들을 착취하기 위해 시스템을 만들어냈는데, 그 사람들이 모두 죽고 난 다음에도 이 시스템은 사라지지 않고, 계속해서 굴러간다. 시스템은 시스템을 이루는 자들을 만들고, 그 사람들은 또 시스템을 유지 재생산하는 일부가 된다. 이렇게 생각이 뻗치다보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이 바로 ‘비바리움’임을 알게 된다.
영화:비바리움(2019)
신의 말씀을 거역하고 선악과를 따먹었다가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아담과 하와는 본디 오래 고생하지 않는 수렵채집인들이었다. 그들은 신의 뜻을 거스른 죄로 정착하는 고단한 삶이 되고 말았다. 남자는 끊임없이 노동하는 존재가 되었으며 여자는 출산의 고통을 겪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비바리움이 말하는 바가 아니겠는가. 시스템은 남자(그리고 여자)를 계속 일하게 하고, 여자는 아이를 낳게 만든다. 둘은 ‘종신토록’ 고생한다. 그것이 우리의 결말이자, 영화의 결말이다. 여기에서 빠져나갈 방법은 없다. 나름대로의 방법을 찾으며 열심히 위안하는 것 뿐. 그걸 알고 있는 우리는이 영화가 불편하다. 이해한 사람이든,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든, 찝찝하고 씁쓸해지는. <비바리움>은 그런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