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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댐 Feb 28. 2020

정가영이 정가영 했다 <하트>

- 영화, <하트>

영화: 하트(2020)

코로나를 뚫고 영화를 보러 간다는 것은, 감독과 영화에 대한 대단한 애정과 기대 없이는 불가능한 행위다. 하지만 나는 마스크를 끼고, 내일이면 코로나 예방 차원에서 한동안 문을 닫는 ‘에무시네마’로 굳이 향했다. <하트>를 보려고.     


<하트>는 주인공 ‘정가영’이 유부남을 사랑하게 돼서 끙끙 앓고, 그 애타는 감정을 유부남에게 상담하(다가 섹스도 하)는 이야기다. 사실 언제나 그랬듯이 스토리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어벤져스를 두고 마틴 스콜세지가 뱉은 발언을 떠올린다. “마블 영화는 영화가 아니다. 솔직히 테마파크라고 생각한다.” 영화는 모름지기 인간의 감정이나 심리적인 경험을 다른 사람에게 전해야 한다는 거장의 말씀. 나는 그의 발언에 100퍼센트 동의한다.     


우리가 극장에서 봤던 영화들은 모두 다른 영화 같지만 대부분 같은 이야기의 반복이다. 비범한 주인공이 복수를 위해 적대자를 처단한다는 ‘해리포터’나 ‘스타워즈’류의 영화들은 모두 하나로 묶을 수 있다. ‘반지의 제왕’류의 모험 이야기도 마찬가지고, 티격태격 어긋나는 남녀가 사랑에 골인하는 로맨스 영화들도 배경과 배우들만 바뀔 뿐 이야기의 근본은 하나도 어긋나지 않는다.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가 봤던 영화를 다시 보는 줄도 모른 채 평생 같은 이야기를 소비하며 살아간다. 나중에는 알던 맛이 아니면 씹어 삼키지도 못하는 지경에 이른다. 이런저런 김치찌개만 먹다 보니까 쌀국수는 먹을 수가 없는 지경인 것이다. 말하자면 정가영 영화는 쌀국수 같은 건데, 사람들이 참맛을 모른다.     


정가영은 이번 <하트>에서도 어느 정도는 사랑을 말하고 있다. 사랑이란 대체 뭘까. <하트>에서 사랑이란 공허한 것이면서, 삶을 추동하는 엔진이면서, 무엇보다 솔직한 것(혹은 솔직해야 하는 것)이면서, 게임이다. 성범의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나 속(heart)으로 기도했어.” 하는 그녀의 말을 들으면 사람 마음속에 있는 것은 다 공허한 사기 같다.      


그런데 그녀는 그 공허함 속에서도 진실한 사랑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있다. “후드티 모자에 항상 콘돔을 넣어 다니는 남자가 있었어. 그런데 어느 날 콘돔을 잃어버린 거야. 그럼 그 남자는 슬플까?” 시간표가 없는 버스 정류장에 서 있는 사람 같다.     


철없는 사람이기도 하다. 에로스적 감정이 주는 긴장감 없이는 도저히 인생을 움직일 수 없는 존재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을 거짓 사랑에 빠뜨리고, 끼를 부리고. 낭만적 교통사고 속에 끊임없이 밀어 넣는다. 그럼으로 생(生)을 실감한다. “동일한 것을 가지더라도, 게임이 없으면 재미가 없는 거지.”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다.     


클리셰로서의 사랑이 아니라 현실의 사랑은 자주 추잡하고, 허황되면서도 아름답고 숭고하다. 그건 한 단어로 정리할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정가영은 그냥 그런 현실의 모습과, 사랑과, 누군가의 경험을 열어주고 있다. 이런 거 하나 정도는 괜찮잖아? 하면서.     

영화: 하트(2020)

정가영의 끼부림엔 공식 같은 게 있다. 되게 비즈니스적인 척하다가, 수줍게 웃다가. 위트 있는 척하다가, 형식적이고 진지한 대화를 나누다가, 갑자기 훅- 도발적이고 솔직한 멘트를 던져서 반전을 주고, 다시 어수룩하게 무마하는 뉘앙스로 흐지부지하는 거다. 그리고 다시 형식적이고 진지한 대화로 방심을 유도하고, 솔직함을 가장해서 욕망을 드러내고, 다시 비즈니스로 가고...     


영화에서 나타나는 그 뻔한 패턴이 나는 밉지 않다. 그런 걸 우리는 매력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 모습은 영화 속 가상의 인물이 아니라, 현실의 정가영과 겹치며 나타나기 때문에 의미 있다. 나는 종종 정가영이 일종의 정신적 바바리맨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녀는 영화를 통해서 자신의 발가벗은 경험들과 정신을 확 펼쳐서 사람들을 놀래키고, “아 이거요? 영화에요~” 하는 것을 즐기는 것 같다. 그래서 사람들이 안 믿을만하면 “이거 영화 같죠? 사실은 진짜임~” 하는 거다. 나는 슈뢰딩거의 고양이마냥 실화이기도 하고, 창작이기도 한 스토리를 흡수한다. 그게 재밌다.      


전작들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이야기를 조금 더 복합적이고 입체적으로 만들고 다양한 연출을 시도했다는 것이다. 누군가는 홍상수 카피캣이라고 하지만 그런 스타일을 홍상수가 특허 낸 것도 아니니까. 너무 차갑게 몰아세우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쉬웠던 건 곳곳에서 너무 설명적이라는 거였다. 그 부분에서 지난 영화들에서 감독이 받았던 상처가 보였다. 자신에게 향할 여러 비판들과, 부정적 예측들을 미리 차단하고 변명하는 느낌. 그건 좋게 보면 자기반성이지만 나쁘게 보면 좀 비겁한 것 같다. 뭐라고 지껄이든 내 할 말 하 떠나는 게 감독 정가영의 바람직한 자세였다고 생각한다. 다양한 해석을 위해 관객의 몫을 많이 열어두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그건 좀 아쉬웠다.     

영화: 하트(2020)

덧붙이면 개인적으로 최태환 님의 연기가 너무 좋았다. 철벽 치는 까칠함, 가벼운 경멸, 진중함, 날카로움, 그리고 은근한 따뜻함, 그런 것들을 분위기에 맞게 잘 표현한 것 같다.      


아무튼 정가영 다운 영화였다. 그녀가 계속 끼 부리는 영화를 찍을지는 모르겠지만 앞으로도 나는 그녀의 신작이 나올 때마다 영화관에서 볼 예정이다. ‘하;ㅋ’라든지 ‘아 미쳤나봐 ㅋㅋ’ 같은 혼잣말과 함께 볼 수 있는 영화는 우주에서 정가영밖에 없다. 경기도어쩌구에서 지원을 받아서 만들었다던데, 여러 곳에서 그런 지원을 알차게 받으셔서 계속 만드셨으면 좋겠다.     


CGV에는 왜 <하트>가 없어서 나는 ‘에무시네마’까지 가야 했을까. 새삼 같은 메뉴만 주구장창 걸어놓는 대형영화관에게 섭섭한 오늘이다. 김치찌개에 두부를 넣든, 참치를 넣든, 돼지고기를 넣든. 그건 김치찌개다. 죽을 때까지 김치찌개만 먹을 수는 없다. 정가영표 쌀국수에 고수 향은 조금 나더라도 이거 되게 맛있는 건데... '사람들에게는 쌀국수를 먹을 권리가 있다!'고 소심하게 외친다.







<하트> 굿즈로 받은 성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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