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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댐 Apr 06. 2020

오로지 사람의 흔적

- 야경에 대한 단상

낙산공원. 나는 그녀를 뒤에서 안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을 볼 수는 없었지만 그래서 같은 곳을 볼 수 있었다. 그녀와 나는 도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검은 산이 검은 하늘 속에서 멀리 그림자처럼 솟아있었고, 건물들과 길거리에는 빛이 가득했다. 빛은 점이나 선, 망울의 형태로 검고 넓은 공간을 얼기설기 채우고 있었다. 야경이었다. 하나도 덥지 않고, 조금도 습하지 않았던 날씨. 볼에 닿는 바람은 따뜻했다. 말랑말랑한 그녀의 촉감을 느끼면서, 어쩐지 달달하게 느껴지는 그녀의 땀 냄새를 언뜻 맡으면서, 나는 설명할 수 없는 평화로움을 느꼈었는데 완벽한 분위기를 만들어준 야경에게는 뜬금없이 조금 미안했다.


야경은 오로지 사람의 흔적. 잠들어야 마땅한 밤풍경을 밝게 비추는 건 가쁜 노동 뿐이었다. 도시를 장식하는 그 빛망울마다, 피곤을 달래가며 생업에 골똘한 개인이 숨어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 나는 그 아름다움과 안쓰러움 사이에서 잠시 멈칫했.


나는 야경을 마주할 때마다 같은 감정을 반복해서 느끼곤 한다. 그것이 한낱 동정이 아닌 까닭은 나 역시 자주 야경의 일원이기 때문이다. 야경을 아름다워하는 이들조차 어느 때는 야경의 일원이 된다. 해가 지기 전에 퇴근해서 휴식하는 사람은 이 땅에 얼마나 될까. ‘저녁이 있는 삶’이라는 너무나 당연한 말이 '바라는 어떤 것'으로 존재하는 세상에서 우리는 때때로 누군가의 야경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야경에서 느끼는 그 안타까움은 나만의 것이 아닐테다.


홍콩섬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빅토리아 피크에서는 그 감정이 한층 더했다. 관광객들은 반짝반짝 빛나는 도시의 야경을 보며 즐거워하고, 사진을 찍고, 저마다 인생의 아름다운 순간을 만끽하고 있었다. 병풍처럼 펼쳐진 그 야경은 형광등 켜진 사무실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도로를 횡단하는 운전수들이, 상점에서 물건을 파는 점원들이 변함없이 채움으로써 성립하는 것이었다. 관광객으로 도착해 어머니의 사진을 찍어주던 나와 노동하는 그들은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 있었지만 완전히 다른 감정을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야경은 야경을 위한 노력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야경은 단순히 먹고 살기위한 노동의 흔적인데, 누군가에게는 낭만적인 풍경이 된다. 노동하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는 홍콩섬 같은 곳은 그러고보면 고단함이 맺혀있어서 관광지가 된 것이었다. 그 아이러니 속에서 나는 충분히 혼란스러울 만 했다.


서해바다의 기울어질 듯한 초소에서 새벽 내내 야간 근무를 설 때에도, 영종대교에는 무수한 차들이 지나다녔다. 헤드라이트는 충혈 되는 법이 없었으므로, 멀찍이 떨어진 나에게도 훤히 보였다. 바다는 캄캄하고 적의 기별은 감감해서, 나는 자주 방탄을 벗고 까슬한 머리를 쓸면서 자동차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았다. 슈웅- 슈웅 빛을 내는 차들은 바람을 가르는 소리를 냈다. 해가 뜰락말락한 정말 이른 새벽이었는데, 그렇게나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 고단함도 멀리서 보면 연했다.


"값싸고 향긋한 커피 속에는 푼돈을 받으며 열 몇 시간씩 노동하는 제3세계 아이들의 눈물이 있습니다." 공정무역에 관한 글에서 읽었던 말이다. 말하자면 그런 것도 일종의 야경이겠지.


빛나는 모든 것에 슬픔이 있다는 것을 떠올리게 되는 순간은 많다. 밤하늘에서 보석처럼 빛나는 별들도 가까이서 보면 불타고 있는 가스덩어리라지. 어쩌면 세상은 참 그렇게 생겨먹었을까.


야경은 오로지 사람의 흔적. 잠들어야 마땅한 밤풍경을 밝게 비추는 건 가쁜 노동 뿐이다. 아경을 아름다워하는 사람조차 어느 때는 야경의 일원이 된다. 야경의 성분이 고단함이라는 것을 의식하는 건 의무일까 사족일까. 낙산공원에서 그녀를 안고 있던 내가 평화로움을 미안해했던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을까 당연한 일이었을까.  


어떤 답을 내든, 내가 그 혼란한 감정을 영원히 느끼리라는 건 변치 않을 것 같다. 내가 벗어날 수 없는 야경의 일원이라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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