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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댐 Apr 01. 2020

소설을 쓸 수 있다는 것

소설을 씁니다 / 소설을 씁시다

사람은 태생적으로 이야기를 싫어할 수 없게 태어났다. 대학교 1학년 때 ‘만화로 철학하기’라는 강좌를 들었는데, 첫 오리엔테이션 수업 때 교수님이 말했다. “참 이상한 일이죠. ‘철학’이라고 하면 폐강이 될랑말랑한데, ‘만화로 철학하기’라고 하면 금세 매진이 돼요.” 교수님 말대로 수업은 정원이 거의 50명에 육박했는데도 순식간에 마감이 됐었다. 교수님은 그 수많은 학생들을 둘러보면서, “미안하지만 여러분들은 속았습니다. 만화는 재미가 없을 거고, 저는 그냥 철학을 가르칩니다.” 하셨다. 실제로 그랬다. 8컷 정도 하는 만화가 유인물에 있기는 했지만 재미라고는 하나도 없었고, 수업은 생각보다 훨씬 어려웠다.    

  

‘철학’이라면 눈살을 찌푸리다가도 ‘만화로 철학하기’라면 그런대로 듣고 싶어지는 이유는 ‘지식 있는가’와 ‘이야기 있는가’의 차이에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이야기에 이끌리는 존재이다. 나 또한 그렇다. (감히)목숨처럼 이야기를 좋아한다. 때로는 이야깃거리를 만들기 위해 살아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우리는 평생 이야기를 소비하거나, 생산하며 살아간다. 영화를 보고, 책을 읽고, 누군가의 경험담을 듣는 것은 이야기를 소비하는 일이다. 이야기의 생산은 대부분 삶을 통해 이루어진다. 매순간 우리가 겪는 모든 사건들이 이야기다. 경험들은 대부분 휘발되지만, 어느 정도는 단편적으로 남아서 하나의 독립적인 이야기로 타인에게 전해진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글을 쓰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이야기들을 머릿속에 담고 있다가 말로 전한다. 그보다 적은 수의 사람들은 글을 쓴다. 그들은 자신이 겪은 사건과, 감정, 생각들을 활자로 남긴다. 뭐가 더 낫다고 굳이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아무래도 글로 적는 편이 낫다. 글로 적은 사건을 말로 옮기는 건 간단하지만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경험을 글로 옮기는 건 무척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많은 일들이 사실은 엉켜있고, 정돈되지 않은 상태로 머릿 속을 떠돈다. 이야기는 마땅히 글로 정리되어야 한다.     


그리고 소설을 쓴다는 것은 이야기를 말로 전한다거나, 경험담을 글로 남기는 것과 비교해서 훨씬 어렵고, 아름답고, (다시 한번 감히)마법 같은 일이다. 그것은 가장 높은 수준의 이야기이다. 왜냐하면 실제로 없었던 일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없었던 일을 새롭게 창조하는 아무에게나 쉽게 허락되지 않는다. 이는 단순한 거짓말이나, 허언증 환자의 망상과는 차원이 다르다. 내 머릿속에서 어떤 이유로 생겨난 생각들이 새롭게 생겨난 인물들과 엉켜서 화학적인 작용을 일으키고, 절반은 의도한대로, 나머지 절반은 전혀 의도하지 않은 대로 섞이며 어떤 장면과 시간을 만들어낸다. 그렇게 완성된 이야기는 세상에서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으나 이제부터는 무한히 반복되는 단단한 세계가 된다.      


내가 이 세계를 만들어냈다니. 나는 소설을 쓸 때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감동에 휩싸인다. 소설이 놀랍도록 참신하고 재미있고 대단해서가 아니라, 내가 어떤 장면을 나의 언어로 빚어냈고, 그 세계가 그런대로 말이 되게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기 때문이다. 내가 설령 A4 한 장 짜리 소설을 썼더라도, 그 속의 주인공들은 그 속에서 무엇인가를 겪고 있다. 나는 소설을 쓸 때 이야기의 결말을 명쾌하게 매듭짓기보다는 어느 타이밍에서 뚝 끊어버리는데, 그렇게 하면 나머지의 삶은 그들이 알아서 살아갈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끝- 이라는 단어 이후를 막연히 상상해보지만, 그때부터 그들의 삶은 다시는 만나지 못할 타인의 삶처럼 여겨진다.       


소설쓰기는 쉽지 않다. 나는 중학교 때부터 막연히 소설을 쓰고 싶어했는데 좀처럼 완성하기 어려웠다. 나름대로 좋은 소재라고 생각해서 소설을 쓰다보면 한 두장이 못돼서 턱턱 막히다가 금세 흥미를 잃었다. 처음 소설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은 스무 살 때였다. 12장 짜리 소설을 쓰는데 한 달이 걸렸다. 쓰는 동안에도 즐거웠지만 수없이 고치고 마침내–끝- 이라는 단어를 적었을 때의 그 후련한 기분 특히나 잊을 수가 없다.      


소설 한 편을 완성한 이후로 나는 세상의 어떤 사람도 침범할 수 없는 ‘새로운 나’라는 존재가 된 것 같았다. 나는 거의 에세이를 쓰지만, 스스로 나라는 사람을 ‘소설을 완성해본 사람.’, ‘나만의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사람’으로 정의한다. 훌륭한 소설가로서의 삶은 내 관심영역 밖이다. 나는 그저 소설을 쓸 수 있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가질 수 있음에 끊임없이 감사하고 또 엄청난 자부심을 느낀다.     


소설가 김영하는 아이가 처음으로 거짓말을 하는 순간에 절대로 혼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아이가 내뱉는 첫 거짓말의 순간은 그가 처음으로 스토리텔링을 시작하는 아름다운 순간이므로, 질문을 통해 그 능력을 더 계발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거짓말은 어떻게 계발되느냐에 따라 미래에 악플이나, 허언증, 사기와 같은 스토리텔링이 될 수도 있고, 언어로 구성된 창조적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스토리텔링의 능력은 누구에게나 있으므로 가급적이면 창조적인 이야기가 되는 편이 좋을 것이다.     


나는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소설을 써보기를 희망한다. 하나의 세계를 상상하고, 글로 옮기고, 그것을 완성했을 때 그 세계가 나 없이도 독립적으로 숨 쉬며 작동하는 기분을 느껴보았으면 좋겠다. 한 장짜리여도 상관없다. 사소한 이야기를 일단 시작하고, 끝내면 된다. 그렇게 하나의 소설을 완성한 이후의 당신은 지금과는 다른 사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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