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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댐 Apr 09. 2020

가수 ‘정우’

- 뮤지션 ‘정우론(論)’

정우: 여섯 번째 토요일(2019)


내가 좋아하는 남자 뮤지션은 셀 수도 없지만, 이상하게 여자 뮤지션은 손으로 꼽을 수 있다. 그냥 순전히 내 취향이 그렇다. 취향에 맞는 여가수들이 적다보니 자연히 같은 가수의 노래들을 질리도록 듣게 된다. 그런 여성 아티스트들의 공통점은 질리도록 들어도 변함없이 좋다는 것이다. 작곡, 작사, 연주, 노래에 이르기까지 약점이란 게 없는, 숨만 쉬어도 음악이 되는, 선우정아같은 가수가 그렇다.    


그런데 오늘은 선우정아 말고, ‘정우’에 대한 글을 쓰려고 한다. 왜냐하면 내가 작년부터 좋아하기 시작해서 테이프(로 듣지는 않고 멜론으로 듣지만)가 늘어지게 듣고 있는 가수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선우정아처럼 폭발적인 가창력을 뽐내거나, 메이져와 마이너를 두루 섭렵하는 묘기에 가까운 장르를 내보이지도 않지만 자신만의 세계를 단단히 구축하고 있다. 나는 그녀의 담담한 음악에 언제나 넋을 놓게 된다.  

  

가수 '정우'


그의 노래를 듣게 되면 순식간에 몇 가지 장점을 느낄 수 있다. 섬세한 가창력, 시적인 가사, 익숙하면서도 낯선 멜로디가 그것이다. 그녀의 목소리는 언뜻 비슷한 목소리들을 떠올리게도 하지만 듣다보면 그녀만의 분명한 음색이 있음을 알게 된다. 번번하고, 잔잔하고, 맥없으면서도 뚜렷하다.  

   

‘다 진 목련처럼 어디 가서
누추해지지 마’라고 성을 내면
더 큰 성화로 끝내 날 버리고 가요
꽃이 진다면 그대 사랑하지 않으리

                             - 꽃이 진다면 中 -


‘어제도 오늘도 아니 잊고 먼 훗날 그때 잊겠다'는. 김소월의 <먼 후일>이라는 시를 떠올린다. 사랑하지 않겠다면 지금부터 그냥 사랑하지 않으면 될 일인데, 왜 꽃이 진 다음에야 사랑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일까, 김소월의 시대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마음속에 절절한 사랑을 억지로 참아낼 수 있는 사람이란 없다. 노래 속의 화자도 그래서 말하는 것이다. ‘꽃이 진다면 그대를 사랑하지 않겠다’고. (그런데 '꽃'이 다시 피면 어떻게 될까?)


시키는 대로 다리 벌리는
가위처럼 굴까요
어디에나 미련 붙이는
풀처럼 굴까요
스테이플러처럼 캉캉
열심히 짖어볼까요
혹은 지우개 가루처럼
숨도 쉬지 말아볼까요
 
-뭐든 될 수 있을 거야 中-   


‘정우’는 이런 가사를 쓴다. '가위처럼 굴까요, 풀처럼 굴까요, 캉캉 짖어나 볼까요.' 당신이 깨어있기만 하면 뭐든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당신이 나를 바라봐 주기만 하면,  뭐든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담담한 목소리가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적극적인 가사다. 사랑에 빠지면 우리는 모두 그런 맹목적인 다짐을 갖게 된다. 그 마음을 풀과 가위로 풀어내기는 쉽지 않지만.


예술이 익숙한 것들을 낯설게 만드는 일이라면 이 노래야말로 그렇다. 그녀는 시가 노래에서 왔듯이, 노래도 시에서 왔다는 사실을 늘 염두하고 있는 사람 같다. 가볍지 않고 솔직하다.

  

가수 '정우'


세상의 욕심들에 초연한 듯한 그녀의 목소리지만, 가사나 곡의 구성을 보면 별로 그렇지는 않아 보인다. 가수 ‘정우’에게는 주관이라든가 욕심같은 것들이 뚜렷해 보인다. 그녀는 목소리를 방해할만하면 어떤 요소이건 다 배제해버린다. 허용하지 않는다. 목소리가 우선, 가사가 그 다음이고, 악기들은 그저 깔린다는 느낌. 소리의 조각들은 목소리가 드러나지 않을 때 밀린 숙제처럼 꺼내놓는다. ‘정우’의 곡은 그래서 균형감보다는 어긋남이 더 잘 느껴진다. 기승전결의 구조를 따르지 않아서, 길이도 조금 애매하고 배치도 묘하게 기울어져 있다.    


그 기울어짐이나 어긋남은 순전히 그녀의 취향일 것이다. 그 취향은 작곡 방식에 있어서도 뚜렷하게 반영된다. 그녀의 노래들 많은 부분에서 가사를 먼저 쓰고 곡조를 얹었을 것이다. 가사를 먼저 쓰고 어울리는 코드를 정해서 이런저런 방식으로 가사를 읽어보면서, 또 즉흥적으로 불러보면서 만든 것 같다. 그저 나의 추측일 뿐이지만, 나는 나름대로 확신다. 그녀의 노래들엔(혹은 노래의 일부) 가사를 먼저 쓸 때에만 만들어지는 박자와 멜로디가 있.

  

음 하나하나를 신경 쓰며 부르는 그녀의 노래를 듣고 있으면 누가 성의 있게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기분을 느끼게 된다. 조금 짓궂지만 착한 친구의 푸념을 듣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때로는 말 잘 통하는 여자사람친구하고 맥주 한 잔을 하면서 떠들고 있는 것 같다. 순한 눈매에서도 또랑또랑한 다정함을 잃지 않는 그녀의 노래를 나는 얼마나 오래, 자주 찾게 될까. 나는 좋은 글이나 영화를 볼 때, 음악을 들을 때면 '이 좋은 걸 왜 다들 모르고 살지.' 혼자서 억울해한다. 많은 사람들이 선우정아의 노래를 들었으면 좋겠듯이, 많은 사람들이 이은규 시인의 시를 읽었으면 좋겠듯이, 많은 사람들이 정가영 감독의 영화를 봤으면 좋겠듯이, 많은 사람들이 정우를 들었으면 좋겠다.


#ctr_sound

#여섯 번째 토요일



가수 '정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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