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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댐 Apr 15. 2020

맞춤법은 너도 틀린다

- 문법에 대한 여러 가지 생각

국어를 전공했다고 하면 사람들은 곧잘 그런 말을 한다. “서댐 씨한테 카톡 보낼 때는 신경을 좀 써야겠네요.” 혹은 어떤 말을 보내 놓고서도 혹시 맞춤법 가지고 속으로 흉을 보지 않았느냐고 묻는다. 그러면 나는 전혀 아니라고 손사래를 친다.      


국어를 전공했다고 말하고 나서는 내 쪽에서도 아무래도 신경을 쓰게 된다. ‘명색이 국어 전공자라는 사람이 맞춤법을 틀리고 그래.’ 그렇게 흉을 볼까봐서다. 되/돼 라든지 로서/로써, 든/던의 용법 같은 걸 틀리지는 않지만 나라고 아예 안 틀리는 건 아니다. 나는 사실 대학교 3학년 때까지도 ‘금세’가 ‘금새’인줄 알았다. 그렇게 알고 썼다가 뒤늦게 고친 기억이 있다. 특히 띄어쓰기는 지금도 어려워서 틀려도 부끄럽지 않을 정도다.     


인터넷에는 맞춤법을 지적하는 이른바 ‘문법나치’들이 꽤 많은데 나는 그런 사람들을 볼 때마다 속으로 웃는 편이다. 대체로 그들이 지적하는 문장조차 완벽하지가 않기 때문이다. 맞춤법에는 철자뿐만 아니라 띄어쓰기도 포함되는 법인데, 굳이 받침이나 표기를 지적하는 사람들도 띄어쓰기는 멋대로 쓰는 경향이 있다. 맞춤법으로 남을 몰아세우면서도 ‘띄어쓰기 정도는~’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자신의 띄어쓰기 정도는 의미만 통하면 무시해도 되지만 남이 틀린 철자는 의미가 통하더라도 꼭 고쳐주어야 한다는 걸까. 그런 심보가 나는 자주 얄밉다.      


임신공격(인신공격), 일해라절해라(이래라저래라), 외숭모(외숙모)처럼 심각하게 의미를 파괴하는 정도가 아니라면 맞춤법은 사실 지적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내가 존경하는 황현산 선생님은 문법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신 바 있다.     


잘못된 말을 지적하며 바로잡는 것도 중요하지만, 문법 공부는 꼰대질을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내 말이나 남의 말이나 말을 깊이 이해하기 위한 것이다.     


아, 이 얼마나 사려 깊고 온당한 말씀인가. 얄팍한 맞춤법 지식으로 남을 심판하려는 자들이 저 문장을 외웠으면 좋겠다고 늘 생각한다.      


한국말은 참 어렵다. 깊이 들어가면 모든 국가의 언어가 어느 정도 복잡한 문법 규칙을 내포하고 있지만, 언어끼리 비교해서도 한국말은 규칙이 어지러운 편에 속한다.     


공부하자는 건 아닌데 잠깐 들어보시라. 국어에서 ‘만큼’은 조사로도 쓰이고 의존명사로도 쓰인다. 예를 들어, ‘할 만큼’은 동사 ‘하다’의 뒤에 만큼이 나오니까 의존명사다. 띄어 쓰면 된다. ‘나만큼’은 명사 뒤에 만큼이 나왔으므로 조사다. 붙여 쓰면 된다.     


그런데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 ‘너를 믿었던만큼 실망이 크다.’ 같은 문장은 띄어 써도 맞고 붙여 써도 맞다. 띄어 쓰면 의존명사로 보고 붙여 쓰면 부사형 연결어미가 된다. 무슨 말인가 싶겠지만 아무튼 그렇다는 게 문법학자들의 설명이다. (이해하거나 외울 필요는 전혀 없다.)     


띄어 쓰는 방법은 같은데 의미는 달라지는, 다음 문장 같은 경우도 있다.     


내가 한 만큼 너도 해.      


이 문장은 띄어 쓰는데 의미는 두 개가 된다. 첫 번째 뜻은 “내가 했으니까 너도 해.”가 되고, 두 번째 뜻은 “내가 한 정도(수준으)로 너도 해.”가 된다.     


이런 걸 국어를 전공하지 않은 사람들이 어떻게 일일이 다 알겠나. 따지고 들면 이렇게 복잡한 것이 한국말이다. 그런데 우리가 ‘만큼’의 띄어쓰기를 모른다고 언어생활을 못하나. 맥락으로 다 이해할 수 있다. 맞춤법도 그렇다. 맥락상 이해만 되면 지적할 이 안 된다. 국립국어원 원장도 “솔직히 말해서 나도 글을 쓸 때 띄어쓰기가 자신 없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만일 누군가 타인의 맞춤법이 평소에 많이 거슬리는 편이라면, 그건 오히려 문법 규칙과 맞춤법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알면 알수록 겸손해지는 게 맞춤법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국어 과외를 할 때, 학생에게 <제망매가>에 대해 가르친 적이 있었다. <제망매가>는 신라 때의 승려 ‘월명사’가 누이를 잃고 슬픈 마음으로 명복을 빌며 지은 노래(시가)이다.       


   죽음과 삶의 길이 바로 여기 있어 머뭇거리고(두렵고)...

   “나는 간다.”는 말도 없이 어찌 그리 가십니까.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여기저기 떨어질 나뭇잎 같습니다.

   같은 나뭇가지에 났어도 가시는 곳을 모르겠네요.

   아! 미타찰(극락)에서 다시 만나는 날까지

   도 닦으며 기다리겠습니다.      


절절한 마음이 찌릿하게 전해지는 이 향가를 가르칠 때는 주의해야 한다. 고전시 해독계의 두 거목이신 김완진 선생과 양주동 선생의 해독이 조금 다르기 때문이다. 월명사가 ‘차힐이견’이라 적은 것을 김완진 선생은 ‘머뭇거리고’로 해석했고 양주동 선생은 ‘두렵고’로 해석했다.      


‘두렵고’로 해독하면 월명사가 누이의 사건을 겪으며 미지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는 것으로 해석되고, ‘머뭇거리고’로 해독하면 죽음의 문턱에서 삶에 대한 미련을 느끼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나로서는 평범하게 알려주고 지나갈 내용이었는데, 학생에게 이를 설명했더니 평소에 그리 호기심이 많지 않던 녀석이 이렇게 물어왔다.      


“정확히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무슨 자신감으로 가르치죠?”     


나한테 한 말일 수도 있고, 작품을 수록한 교육과정에 한 말일 수도 있는데 이해가 전혀 안 가는 것은 아니었다. 정확히 무슨 뜻인 확실하지도 않은데 좋은 작품이라고 가르치고 있으니 조금 기분 나쁠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런데 내가 조금도 당황하지 않은 까닭은, 그게 두려움이든 머뭇거림이든 월명사의 애틋한 마음이 변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제망매가를 읽으면서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다. 한 뱃속에서 태어나 피를 나눈 누이가 먼저 세상을 떠나 슬퍼하고, 그녀와 다시 만나기를 소망하는 동생의 안타까운 마음을. 그러니까 사실 중요한 건 맞춤법도, 단어의 엄밀한 정의도 아닌 것이다.      


나는 맥락만 맞으면 맞춤법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한다. 어디 가서 망신당하지 않도록 내가 알려준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 마음도 따지고 보면 자신의 불편함에 불과하다. 고쳐주는 것은 개인의 자유지만 내 생각에는 맞춤법을 교정하기보다는 대화에 집중하는 편이 나은 것 같다. 황현산 선생님의 말처럼 문법 지식은 남과 나의 말을 잘 이해하기 위한 것이니까.


그리고 어느 날 나는 황현산 선생님이 왜 남과 ‘나’라고 했는지 문득 알 것 같았다. 내가 하는 말의 정확도를 높이기에도 빠듯하다는 뜻이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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