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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댐 Jul 06. 2020

낙산공원은 겹쳐있다

서울에서 제일 좋아하는 곳이 어디냐고 물으면, 나는 주저 없이 낙산공원을 꼽는다. 혜화동, 동숭동. 대학로 근처는 지하철역에서 내릴 때부터 어떤 분위기가 있다. 한낮의 마로니에 공원은 늘 선명하고 맑았다. 설익은 버스커들의 음악소리와 발로 차일 걱정을 오래전에 잊은 위풍당당한 비둘기들, 연극표를 팔겠다고 달려드는 어설픈 아르바이트 노동자들, 날씨가 좋으면 좋은 대로 흐리면 흐린 대로 좋다고 히히덕거리며 걷는 커플들. 나는 그런 장면들과, 지하철역에서부터 손을 잡고 구불구불 낙산공원 꼭대기까지 올라가는 길을 늘 사랑했다.     


B는 날 때부터 줄곧 쌍문동에 살았다고 했다. 쌍문에서 혜화는 가까우니까,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동생들을 데리고 혜화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고. 내가 느낀 혜화의 분위기는 그래서 그녀에게 너무도 익숙한 것이었지만, 그녀는 내 들뜸에 늘 동조해주었다. 우리는 거기에서 자주 만나 놀았다. 연애도 추억을 쌓으며 성장하는 셈이니, '우리의 연애'가 한 명의 아이라면 혜화는 그 아이가 뛰놀던 앞마당이라고 해도 어색하지 않았다.     


혜화의 길은 꽤 꼬불꼬불해서 처음에는 조금 헷갈리기도 했다. 때로는 빠져야할 골목을 잃고 한 바퀴를 더 돈다거나, 낙산공원에 올라갔다가 잘못 내려와 지하철역까지 돌아오는 데에 한참이나 걸린 적도 있었다. 제 집처럼 그쪽 지리가 훤한 그녀가 앞장섰다면 길을 잃는 일은 없었을 테지만. 그냥 내가 아는 듯이 걷는 길을, 틀린 줄 알면서도 따라와 주었던 것이다. 그걸 깨닫게 된 건 한참이 지나고 지하철역에 내려온 뒤였다. ‘왜 아는 길을 모른척했어. 빙빙 돌았잖아.’ 나는 뒤늦게 민망해져서 툴툴댔다. ‘그냥 자신 있게 앞장서는 모습이 귀여웠어.’ 그녀는 별일도 아니라는 듯 웃었다.      


운명이라는 이름을 달고, 이별과 만남은 계속해서 찾아왔다.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추억은 미화되기도 하고, 변색되기도 했으나 낙산공원 여전히 좋았다. B와 헤어지고, C하고도 낙산공원에 올라갔다. 야경을 내려다보며 감동했다. D하고도 갔고 E하고도 갔다. 그렇게 낯설던 길이 시시할 정도로 단조롭게 보일 때까지 자주 갔다. 이렇게 시시한 골목에서 길을 잃었다니. 허탈한 미소가 입가에 머물려다 사라졌다. 이젠 길을 잃지도 않는다.


얼마 전 다른 일로 오랜만에 찾은 혜화는 그대로였다. 걷는 길 구석구석에는 아직 그 웃음들이 잔상처럼 일렁이는 것 같았다. 2013년의 나와, 2014년의 나와, 2015년의 나와, 그 다음 다음의 나와, 그녀들의 웃음소리였다. 전파에 휘말리는 잡음 섞인 라디오 소리처럼 머릿속에서 지직거렸다.      


봄에는 금강산, 여름에는 봉래산, 가을에는 풍악산, 겨울에는 개골산. 금강산에는 계절에 따라 네 가지의 이름이 있다는데, 그러고 보면 네 개의 이름을 붙인 옛 사람들은 진즉에 알았던 것이다. 계절마다 다른 모습이니 그 산을 같은 이름으로 부를 수는 없다는 것을. 그러니까 나의 낙산공원도 2013년과 2014년과 2015년을, 16·17·18·19년을 다르게 불러야한다. 그곳은 같은 낙산공원이 아니므로.     


추억은 지박령처럼 한동안 이승을 현현하게 떠돈다. 나는 동일한 풍경에서 내가 존재했던 각기 다른 수많은 장면들을 생각하며. “같은 곳-다른 곳.”, “같은 곳-다른 곳.”을 수없이 읊조린다. 낙산공원 벤치에서 그녀와 나는 앉아 있었다. 그 순간은 이제 지나갔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다른 사람이듯, 어제의 그녀와 오늘의 그녀는 다른 사람이고, 어제의 낙산공원과 오늘의 낙산공원도 다른 곳이겠지. 그리고 그 공간은 나만의 것이 아니니,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의 낙산공원까지 더해서 생각하면 할 말 없이 아득해진다. 낙산공원에는 얼마나 많은 낙산공원이 겹쳐 있을까. 그런 질문으로 복잡한 밤이 종종 있다.


2020.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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