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댐 Jul 01. 2020

동굴을 위한 여행

6월 25-28일, 삼척.

대학 동아리 후배와 여행 날짜를 먼저 정하고 어디로 갈지 고민하고 있었다. 며칠 고민하다가 삼척에 가자고 말했다. “형, 삼척은 왜요?” 동생이 물었고, “응. 거기 환선굴이라는 동굴이 있대. 동굴을 좀 보고 싶어.” 내가 대답했다. 동생은 고맙게도 “그래요. 가요.” 하고 대답해주었다. 3박4일 삼척 여행은 말하자면 동굴을 위해 시작된 것이었다.      


삼척항이 내려다보이는 숙소에서 머물렀다. 둘째 날, 10시까지 늘어지게 자고 일어나서 느긋하게 준비를 한 뒤, 대구지리탕과 물회를 먹었다. 새콤달콤하고 아삭한 야채와 회를 크게 집어서 입에 밀어 넣고 씹다보면 생선살의 고소하고 달큰한 풍미가 입 속에 퍼졌다. 맑고 시원한 지리탕 국물과 쫄깃한 대구살도 일품이었다. 기분 좋게 점심을 해치우고 환선굴로 출발했다.     


환선굴은 삼척항에서 꽤나 떨어져있어서 40분 정도 운전을 해서 가야했다. 강원도 특유의 꼬불꼬불한 길을 따라 울창한 산의 품속으로 자꾸만 들어갔다. 금요일 낮이라 그런지 차도, 사람도 별로 없었다. ‘어디까지 들어가야 되는 거야.’ 입구 매표소는 표지판을 따라서도 꽤나 깊이 들어가고 나서야 보였다. 산으로 사방이 겹겹이 싸인 곳이었다.     


동굴에 처음으로 매료된 순간을 잊지 못한다. 2017년 혼자 제주도 여행을 갔을 때였다. 공항에서 내리자마자 캐리어를 질질 끌며 서쪽 해안을 훑어 내려왔다. 아무 계획이 없었기 때문에, 그리고 면허는 있었지만 운전을 제대로 할 줄 몰랐기 때문에, 걷거나 버스를 타며 다녀야 했다. 협재, 애월을 구경하고 한림공원까지 들렀다. 개인이 직접 가꾸기 시작했다는 공원은 규모가 어마어마했다. 더운 날씨도 잊고 꽃과 나무들이 가득한 공간을 구경했다.


그러다 만난 곳이 동굴이었다. 쌍용굴, 협재굴, 황금굴. 한림공원 안에는 동굴이 몇 개나 있었다. ‘와 좋다.’ 그리 규모가 크지 않았음에도 동굴에 들어서자마자 숨이 턱하고 막힐 것 같았다. 과장이 아니라, 그 순간 내 눈 앞에는 동굴의 장면이 수 백년, 수 천년, 수 만년씩 순서대로 되감아 펼쳐지는 듯 했다.


곧이어 이 동굴을 처음 발견했을 원시 인류를 상상했다. 아주 먼 옛날. 울창한 숲 속, 이 동굴의 초입으로 천천히 다가왔을 최초의 사람. 그는 이 껌껌하고 서늘한 공간을 마주하면서 어떤 감정을 느꼈을까. 두려움이었을까, 호기심이었을까, 아니면 무심함이었을까.


시공을 뛰어넘는 상상을 하며 시원한 동굴 속을 천천히 걷는 동안 놀이기구를 타는 것처럼 짜릿했다. 세상 모든 동굴을 찾아 걸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도 그때였다.     


환선굴은 한림공원의 쌍용동굴과는 차원이 다르게 컸다. 엄청 높고 깊은 곳에 있어서 모노레일을 타고 올라가야 했고, 그렇게 도착한 환선굴은 입구부터 규모가 어마무시 했다. 동굴 내부는 워낙 넓었기 때문에 철골로 된 동선을 따라 걷도록 짜여져 있었다. 그곳은 원효대사가 잠시 비를 피했을 만한 장소가 아니라, 영화 <잃어버린 세계를 찾아서>에 나올법한 미지의 세계에 가까웠다. 세심하게 계산된 조명이 내부를 밝히고 있었는데, 그 안에는 폭포도 있었고, 계곡도 있었고, 절벽도 있었다. 놀라웠다.     


환선굴을 제대로 구경하기 위해서는 동선과 조명. 이 두 가지를 신경 써야 한다는 것을 직감으로 느낄 수 있었다. 한 바퀴를 돌아 나오는 데만 한 시간이 걸리는 이 큰 동굴의 동선은 최대한 효율적으로 설계해야만 했을 것임에도 중간중간 주 동선에서 샛길처럼 빠지는 길이 있었다. 이 샛길은 들어가 봐야 이어지는 길이 없어서 다시 돌아 나와야 하고, 사람들이 많을 경우 들고 나오는 길이 겹쳐 번거로움도 커지게 된다. 그러니까, 그렇게 샛길이 난 곳에는 꼭 보아야 할 ‘어떤 것’이 있다는 얘기였다. 거기까지 길을 내어 빙 둘러올 수는 없지만 설계자가 샛길을 내서라도 꼭 보여주고 싶었던 것. 실제로 그곳에 정말 진기한 장면들이 많았다. 커튼처럼 펼쳐지는 석순들, 맑은 물이 깊은 골짜기, 물결처럼 형성되고 덮인 유석들 등. 장관이었다.  

    

중간쯤에는 ‘지옥교’라는 이름의 다리를 건너게 되는데, 한 발짝 딛어보니 일종의 출렁다리였다. 동굴 가장 높은 곳에 바닥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출렁다리라니. 이름 그대로였다. 높은 곳을 좋아하는데도 오금이 저렸다. 그 다음에는 ‘참회의 다리’였는데, 그 이름처럼 역시나 출렁다리였다. 두려움으로 참회를 이끌어내는 솜씨가 제법이었다. 나도 있는 죄, 없는 죄를 읊조리며 절로 참회했다.     


5억 3천만 년 전에 생성되었다는 환선굴은 그 자체가 시간이 눈에 보이는 형태로 형상화된 곳이었다. 그 앞에서 고작 30년도 살지 못한 나의 존재는 한없이 초라해졌다. 나는 물 한 방울 한 방울 속에 녹아있던 탄산칼슘이 아주 오랜 시간, 아주 조금씩 쌓여서 만들어진 종유석들, 석순들을 멍하니 바라볼 수 있을 뿐 그들의 역사를 도무지 가늠할 수는 없었다.     


라스코 벽화로 유명한 라스코 동굴은 1940년 9월, 프랑스의 네 소년에 의해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들은 숲에서 동굴의 입구를 발견하고 땅을 파 들어갔다. 그 안에 그려져 있는 수많은 동물 그림들도 확인할 수 있었다. 그곳이 심상치 않은 곳임을 직감한 소년들은 자발적으로 동굴을 1년씩이나 지켰다고 한다. 그 소년들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라스코 동굴도, 벽화의 행방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제주한림공원의 쌍용동굴을 다녀온 이후의 나. 그리고 삼척의 환선굴을 다녀온 나는, 그 소년들이 자발적으로 1년이 넘는 시간동안 동굴을 지킨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동굴은 아름다울뿐만 아니라 철학적이기까지 하다. 인간을 시간이라는 장엄한 개념 속에 내던진다. 100년도 살지 못하는 인간에게 펼쳐진 그 어마어마한 시간의 흔적은 삶의 유한성을 뼈저리게 깨닫게 해주는 한편, 아주 오랫동안 내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도 일깨운다. ‘태어나기 전 억겁의 시간동안 존재하지 않은 채로 아무렇지 않았던 너는, 죽어 없어져 영원히 존재하지 않더라도 아무렇지 않을 거야.’ 동굴이 나에게 자꾸 그런 말을 건네는 것 같았다.     



매거진의 이전글 일병, 이등병 비요뜨 금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