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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댐 May 04. 2020

인천에서

- 나의 애틋한 도시

나는 지금 인천에 있다. 인천은 나에게 그야말로 애틋한 도시다.


이곳엔 고등학교 1학년 때 처음 왔다. 아무리 떠올려봐도 열심히 공부한 기억은 없는데, 이상하게 학업 스트레스는 남들만큼 잔뜩 가지고 있었다. 가슴이 답답해서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던 어느날. 나와 친구는 지하철 노선도를 더듬어보며, 가장 멀리 갈 수 있는 곳을 찾기로 했다. 각 지하철 노선의 종점이었다. 곧 우리는 분당에도 가고, 일산에도 갔다. 그런데 그곳들은 내려보니 진짜 아무것도 없었다. 애를 써서 도착했으면 가슴을 뚫어줄 만한 무엇인가가 있어야 했는데, 그냥 멋없는 상가와 프렌차이즈 음식점들만 가득했다. 우리는 몇 시간씩이나 지하철을 타고 도착해서는 피시방에서 게임을 한 두 판 한다든가, 당구만 한 두 게임 치고 돌아왔다.


인천은 달랐다. 지하철에서 내려 인천역을 나가자마자 차이나타운의 화려한 간판과 입구가 보였다. 우리는 눈밭을 뛰어다니는 강아지처럼 신나서 차이나타운의 언덕을 내달리며 올라갔다. 차이나타운에는 정말 중국사람이 있었다. "야 저거 중국인 아니냐." "여기 차이나타운이잖아." 실없는 대화를 했다. 중국집도 많았다. 길거리에서는 테이블을 갖다 놓고 시식행사도 하고 있어서 접시에 담긴 중국 과자를 몇 개 집어 먹었다. 먼저 와서 먹고 있던 아주머니가 쳐다보길래, 나도 같이 쳐다봤는데 "학생, 이거 우리가 사 먹는 거야."라고 하셔서 진땀을 내며 사과했다. 정말 정말 죄송하다고 구십 도로 허리를 몇 번이나 꺾어서 사과를 올렸더니 웃으면서 괜찮다고 하셨다. 친구와 서로의 어깨를 주먹으로 때리면서 "아, 너 때문이잖아." 투닥거렸다. 민망하다는 얘기였다.  


차이나타운을 따라 계속 올라가면 맥아더 공원이 나왔다. 정자가 있었다.


거기 올라가니까, 우와. 바다가, 보였다. 멀리 건물처럼 큰 배들이 항구에 정박해있었다. 바람이 몹시 시원하게 불었고 어렴풋한 바다 냄새 맡으면서 온몸으로 그 바닷바람을 맞았다. 해가 질랑 말랑했다.  우리는 그대로 길을 따라 내려오면서 무슨 삼국지가 그려진 벽화를 구경했다. 월미도로 가자. 나와 친구 두 명이 더 있었는데, 누군가가 말했다. 버스 타고 가면 금방인데 괜히 걸어가기로 했다. 한참이나 걸렸다.


당시 월미은하레일 짓는다고 시끌시끌했다. 진짜 소리가 들린 건 아니고, 뭐 여기저기 그림 같은 거 붙어 있고 그랬다. 여기에 이런 거 생깁니다. 하는 섣부른 자랑이었다. 몇 년 뒤에 공사 끝나면 이거 타러 오자. 친구들하고 약속했었는데 부실공사니 뭐니 여러 번 사업이 엎어지고 올해 2월에서야 제대로 된 운영이 시작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월미도로 가서 제일 먼저 한 건 맥주를 마시는 거였다. 나는 워낙 동안이어서 불가능했고, 조금 조숙한 얼굴을 지닌 친구가 편의점에서 맥주를 샀다. 신분증 검사도 없이 그냥 주길래 웬 떡이냐 하면서 킬킬댔다. 월미도에서 바다를 바라보면서 친구들하고 맥주를 마셨다. 카프리였다. 아, 그전에 그냥 돌려서 따면 되는 건데 딸 줄 몰라서 편의점에 다시 들어갔었다. 병따개 달라고 했더니 아르바이트 형이 그냥 손으로 돌려서 딱딱딱 세 개를 다 따주었다.


맥주 먹고, 셋이서 벤치에 앉아서 노래도 좀 부르고, 멍하니 앉아있다가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집으로 가는 지하철에서는 잠이 쏟아졌다. 친구가 지하철 봉에 기대고, 나는 그 친구 어깨에 기대고 또 하나는 내 어깨에 기대고, 그렇게 졸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늦은 밤에야 도착했다. 뭘 하다가 이렇게 늦었느냐고 어머니가 물었고, 나는 인천에 간 우리의 모험담을 재미있게 이야기해드렸다. "아무튼 너넨 참 특이해" 어머니는 혼내지 않으셨다.


우리는 그 해에 한두 번 더 인천에 갔다. 고2 때도 몇 번, 고3 때도 몇 번을 갔다. 그때마다 차이나타운 꼭대기 정자에서는 바람이 세차게 불었고, 월미은하레일은 공사 중이었고, 맥주를 먹었고, 신분증 검사는 여전히 하지 않았고, 실없이 걸어 다니다가, 지하철을 타고 졸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고등학생 때의 소중한 추억이다.


그리고 오늘의 나는 다시 인천에 있다. 월요일 수요일 휴가를 내서 월미도 근처에 호텔을 잡았다. 바다가 보이는 방이다. 생각보다 훨씬 깔끔하고 예뻐서 기분이 좋았다.


오늘은 호텔에서 뒹굴기만 했다. 책을 읽고 노래를 듣고 기타를 쳤다. (유난인가 싶었는데 기타 가져오길 잘했다.) 유튜브를 보고 낮잠도 잤다. 저녁이 되어서야 잠깐 나와서 신승반점에서 유니짜장을 먹고 돌아왔다. 지금은 프링글스를 씹으면서 스텔라를 마시고 있다. (프링글스는 언제 이렇게 작아진 걸까. 내 입이 커진 걸까.) 방에는 에어컨 돌아가는 소리,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 그리고 나만 있다. 조금 외로운 기분이 들지만 적당히 외로워서 분위기 있다. 내일은 월미도에서 맥주를 먹을 생각이다. 인천에 오니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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