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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댐 May 10. 2020

그 겨울의 림보

틈이 있는 곳마다 수용성 잉크처럼 추위가 번지는 밤이었다. 숨을 쉴 때마다 얼음가루가 폐 속으로 빨려 들어오는 것 같은 겨울, 나는 집으로 돌아오는 중이었다. 지하철역에서 내려 주택가로 들어서자 익숙한 풍경이 눈으로 들어왔다. CU와 세븐일레븐, 신축 모텔 하나, 마트 하나, 미용실, 세탁소, 그리고 정면으로 유료주차장. 나는 그 유료주차장을 오른편에 두고 계속 걸어가야 했다. 그 자리에는 늘 주차장이 있었으므로 평소에 별로 신경 쓰지 않았었는데, 그날은 새삼스럽게 한 번 더 쳐다보게 됐다. 정면으로 부는 바람이 너무 차서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는데 유료주차장의 입구와 경비초소, 차단기가 문득 눈에 띄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경비초소’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크기였다. 성인 남자가 들어가 앉으면 양팔을 벌릴 수도 없는 공간. 그곳은 그저 차단기를 올렸다 내리거나, 주차비를 수납할 수 있는 용도에 너무도 충실한 구조물이었다. 상점들마저 거의 닫아 사위마저 어두워, 푸르스름한 조명 속의 남자가 한층 도드라져 보였다.    

    

멀찍이 떨어진 나는 한 뼘으로 잡힐 만한 네모난 공간 속 늙은 주름의 그가 적막이라는 이름으로 앉아있다고 생각했다. 그 존재가 정확히 그 단어로 치환되는 것 같았다. 드문드문한 행인들의 걸음은 역병을 피하듯 빨랐고, 나만 잠시 서서 그를 훔쳐보았다. 마른 얼룩처럼 멈춰있는 그의 표정이 한 시간에 오백 원, 오래된 이용요금표와 함께 유리창에 서려있었다. 주차장 차단기가 바람에 위아래로 흔들렸다.      


영화 <인셉션>의 특수요원 코브(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상대방의 꿈에 접속해 생각을 심는 작전을 진행하다가, 일이 틀어져 꿈속의 꿈, 혹은 영원한 무의식의 세계인 ‘림보’에 갇히고 만다. 자칫하면 영겁의 시간동안 표류해야할 지도 모를 코브는 현실감각을 간신히 되찾아 각성하고, 유일한 방법인 죽음을 결단하면서 탈출에 성공한다.      


인셉션의 ‘림보’는 그 뜻이 가톨릭의 ‘고성소’에서 왔다. 죽으면 아무것도 없다는 무신론이나, 천국 혹은 지옥으로 이분되는 개신교와 달리, 가톨릭에서는 천국이나 지옥으로의 이동이 유예된 ‘연옥’ 개념이 있는데, 고성소도 이와 비슷한 장소다. 연옥이 자잘한 죄를 정화하며 머무는 곳이라면 고성소는 원죄 이외에는 스스로 지은 죄가 없는 영혼이 머무는 곳이라고 한다. 영화는 아마 ‘림보’라는 단어를 통해 메시아가 세상을 구원하는 날까지 유예된 세계, 그 고성소와 같은 아득함을 표현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날의 나는 유료주차장 앞에서 림보를 떠올렸다. 작은 경비초소에 앉아있는 그가 마치 림보에 갇혀있는 것 같았다. 고성소와 닮아 보인 그 공간은 막막했고, 허름했다. 그가 언제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을지 막막하기만 했다. 핸드폰이라도, 책이라도 보시지. 어디를 보는지 알 수 없는 그 흐릿한 시선 탓에 그 속의 시간이 완전히 멈춰있는 것만 같았다.      


차단기의 모습 또한 림보였다. 어릴 때 보았던 예능프로그램에서는 젊은 가수, 배우들이 남녀 짝을 짓기 위해 림보 게임을 했다. 높이가 거의 허리춤까지 낮아졌음에도 불구하고, 몇몇은 놀라운 유연성을 선보이며 무릎과 허리를 꺾어 통과했다. 남아메리카에서 발원한 곡예의 일종이라는 림보 춤은 그 뜻이 수용소에서 왔다는데, 초소 속의 그가 어디로부터 수용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주차장 입구의 림보 막대가 계속계속 흔들렸다.        


롱 패딩의 지퍼를 끝까지 올리고 모자를 썼는데도 바람에 눈이 시리고 아렸다. 턱을 잔뜩 당기고 모자의 끈을 끝까지 조였는데도 조금도 나아지지 않아서, 나는 다시 걸음을 재촉할 수밖에 없었다. 그 즈음 그와 잠시 눈이 마주치기도 했다. 황급히 고개를 돌려 몸을 웅크리고 잰걸음으로 집을 향해 움직이면서 나의 이 안쓰러움이 주제넘고 오만한 상상이기를 바랐다. 그가 퇴근하고 집에 가서 온화한 아내와 함께 몇 마디 대화를 나누고, 주말에는 잘 키운 자식들이 귀여운 손주를 데리고 방문하기를. 그가 그 밤의 나를 떠올리며, ‘요즘 젊은 청년들은 늦은 시간까지 열심히란 말이야.’ 팍팍한 세상의 젊은이라 참 안쓰럽다고. 되려 걱정하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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