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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댐 May 19. 2020

햄버거를 좋아하는 것처럼 좋아하기

빅맥을 좋아하세요

햄버거가 패스트푸드라는 별명만큼 자주, 정크푸드(junk food)로 불린지는 오래되었다. 정크푸드에서 ‘정크(junk)’는 쓰레기를 의미한다. 그래도 사람 먹는 음식인데 쓰레기라니. 부르던 대로 패스트푸드라고 부르면 될 것 같은데, 언론에서는 나트륨 덩어리인 김치는 암도 예방한다고 추켜세우면서 유독 햄버거에 박한 것 같다. 우스개로 햄버거는 탄수화물, 단백질, 지방. 이른바 ‘탄단지’가 고루 겸비된 완전식품이라는 이야기도 있는데, 맛있는 게 기특해서라도 좋게좋게 봐주면 될 것을. 햄버거 좋아하는 입장에서 섭섭하지 않을 수 없다.     

기억나는 가장 어린 날로부터 지금까지 늘 햄버거를 좋아했다. 아토피가 있어서 어머니가 잘 사주시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이모나 삼촌을 만나거나, 유원지 같은 곳에 놀러 가거나 하면 내가 유별나게 좋아하는 것을 알고 꼭 사주셨다. 그래서인지 나는 지금도 이모나 삼촌을 굉장히 좋아하고, 놀이공원도 아주 좋아한다. 그런 데에는 아마 햄버거로 인해 분비됐던 도파민의 영향도 있을 것이다.     


1998년, 1999년. 그즈음의 맥도날드에서는 연말에 햄버거 세트를 얼마 이상 사 먹으면 쿠폰북 같은 걸 주었는데, 늘 내 몫이었다. 멍청한 형은 그걸 챙길 생각조차 못했다. 형이 눈치채기도 전에 발 빠르게 챙겨가지고, 장롱 어디에 숨겨놓고 다달이 행사상품을 무료로 받아먹었다. 명함만 한 크기의 <1월-애플파이> 쿠폰을 정성껏 오려가지고, 꽤나 먼 길을 걸어 맥도날드로 갔던 8살의 내 모습을 떠올리면 너무 귀엽다. 쿠폰을 낼 때의 시야가 지금도 기억난다. 주문하는 데스크가 내 키보다 높아서 까치발을 들며 쿠폰을 냈고, 아르바이트하던 누나(지금은 벌써 불혹을 넘겼을)는 웃으면서 애플파이를 건네주었다. 속이 그렇게 뜨거운 줄 모르고 섣불리 베어 물다가 입을 데면서도 그렇게나 맛있었다.      


스무 살 이후 내가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 가장 뿌듯했던 것 중 하나도 내 의지대로 햄버거를 사 먹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어릴 때 원대로 먹지 못해서 맺힌 게 많았는지, 정말 많이도 사 먹었다. 지금도 나는 햄버거를 일주일에 두 번은 먹는다. 과외를 하러 다닐 때는 일주일에 다섯 번씩 먹은 주도 흔했다. 이제는 아토피도 거의 없고, 늘 날씬한 편이라서 누구의 눈치를 볼 일도 없다.     


요새 맘스터치니 버거킹이니 햄버거 먹을 줄 모르는 사람들이 떠드는데, 수많은 햄버거를 질리도록 먹어본 내 입장에서 가장 맛있는 햄버거를 꼽으라면 단연 빅맥이다. 나에게 햄버거의 완전한 형태는 빅맥으로 수렴한다. 이건 정말 객관적인 판단이다. 무슨 눈물 젖은 추억이 있어서가 아니고, 이것저것 다양하게 먹어본 뒤에 최종적으로 내린 결론이 그렇다.     


싸이버거나 상하이스파이시버거 같은 햄버거는 패티가 치킨이라는 점에서 일단 이단(異端)이다. 맛이야 있겠으나 애초에 그냥 먹어도 맛있는 걸 햄버거 사이에 끼워놓을 필요가 있을까. 튀긴 닭고기는 빵의 힘을 빌리지 않아도 완전한데 굳이 햄버거여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버거킹 같은 경우에는 너무 과하다는 게 문제다. 중용(中庸)이란 만고불변의 진리이거늘, 버거킹은 무슨 끝장이라도 내겠다는 것처럼, 양도 많고 맛도 부담스럽다. 특히 뻑뻑하고 두툼한 빵은 목을 턱턱 막히게 만들어서, 먹고 나면 꼭 불쾌한 포만감을 준다.      


이태원, 강남, 가로수길 등지에서 세를 떨치고 있는 수제버거라든가, 쉑쉑버거같은 프리미엄 버거도 나는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왜 그 가격을 주고 햄버거를 먹어야 하는가. 가끔 <6시 내 고향>에서 볼 수 있는 전복라면이라든가, 대하라면처럼. 눈치 없이 신입생 MT에 따라온 고학번 복학생처럼, 자신의 위치를 망각한 기분이 든다. 우리에게 랍스터를 넣은 떡볶이가 필요 없듯, 스테이크에 필적하는 육즙의 햄버거도 불필요하다.     


빅맥이 완전한 이유는, 그 정통성을 굳이 거론할 필요도 없이 그야말로 중용(中庸)의 덕을 온몸으로 실현하는 맛이기 때문이다. 말도 안 되게 자극적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맥락 없이 심심하지도 않으며. 어디서나 비슷한 맛을 내면서도 그 만족감은 항상 지불하는 가격을 상회한다. 빅맥의 재료는 따로 떼어서 먹으면 평범하거나, 심지어는 허접하기까지 한데, 그 모든 싸구려 재료들이 하모니를 이룰 때, 비로소 정말 깊은 풍미를 낸다는 점도 놀랍다.     


햄버거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이 조금 경박해 보이거나, 내 저급한 입맛을 드러내는 것 같아 망설인 적도 잠깐 있었는데, 이제 나는 그런 걱정은 조금도 하지 않고, “나는 빅맥이 좋아 나는 빅맥이 좋아.” 그렇게 자신있게 떠든다. 나의 입맛을 폄하하든 말든, 나이 먹고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빅맥이 뭐냐고, 면박을 주든 말든 내가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빅맥을 좋아하듯이, 나는 사람도 내 마음대로 좋아한다.  

   

어느 날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싸구려 빅맥 조차도 아무 조건 없이,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좋아할 수 있는 내가. 왜 사람은 그렇게 좋아하지 못할까. 나는 빅맥을 좋아하면서, 빅맥도 나를 좋아해야 한다고 생각해본 적이 한 번도 없는데, 왜 사람을 좋아할 때는 상대방도 나를 좋아해 주기를 바랐을까. ‘좋아해도 될까?’ 왜 속으로 고민하면서 그 사람의 동의를 얻으려고 했을까. 어느 순간부터는 그냥 나의 마음을 중심에 두고, 햄버거를 좋아하는 것처럼 사람을 좋아하기로 했다.      


최근 몇 년 동안 나는 좋은 사람을 눈치 보지 않고 좋아한다. 그것이 남자든 여자든, 선배든 후배든 할 것 없이 그냥 내가 좋으면 마음속으로 열심히 좋아한다. 유별나게 티를 내거나 친한 척을 하지도, 유난스러운 표현을 하지도 않고 그저 마음속으로 충분히 좋아하는 것이다. 내가 그렇게 좋아하면 그게 스멀스멀 새어 나오는지 상대방도 곧 그걸 느꼈다. 뭘 할 필요도 없이 그냥 내가 좋아하면 되는 거였구나. 싫어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만큼 열심히 싫어하게 된다는 부작용도 조금 생겼지만. 아무튼 많은 관계들이 무난한 행복 속에서 돌아갔다. 그게 마음에 들어서, 계속 그렇게 살아보기로 했다.      


누군가 마음 놓고 좋아할 용기가 없는 사람들은 빅맥을 좋아하고, 좋아한다고 떠들고 다닐 필요가 있다. 차근차근 빅맥부터 시작한다면 곧 사람에 이르게 될 것이다. "좋아하는 것은 오로지 나의 자유. 좋은 것을 좋아하라." 그게 내가 빅맥으로부터 받은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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