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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댐 Jun 12. 2020

아무거나 쓰고 싶어서

30분 적고 30분 고침

아무거나 쓰고 싶어서 빈 문서 하나를 열었다. 이제부터 아무거나 써서 에이포 한 장 반 정도를 채울 것이다.


사실 나는 아무거나 써도 글이 된다는 것을 배운 적이 있다. 대학교 때 교수님께서 수업시간에 작은 활동 하나를 시키셨다. 시간을 2분 정도 줄 텐데, 가장 많은 ‘글자’를 쓴 사람에게 상을 준다는 거였다. 내용 같은 것은 보지 않으니 그냥 많이 쓰기만 하면 된다고 하셨다. 단, ‘바람’이라는 단어로 글을 시작하라고 하셨다.


“교수님, 바람바람바람바람바람… 이렇게만 써도 됩니까?”


교수님은 그렇게 해도 괜찮다고 답하셨다. 많이만 쓰면 된다고? 뭐야 완전 쉽네. 우리 모두는 각자 자신이 1등을 할 것이라 생각했다. 교수님이 스탑워치를 틀었다. 시-작. 다 같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바람이 차다. 바람이 불었다. 바람은 어디에서 부는 걸까. 뭐 그런 식으로 글을 써 나갔던 것 같다. 2분은 순식간에 끝났고, 140자를 넘게 쓴 친구도 있었다. 나는 턱도 없이 적은 글을 썼다. 1등을 못한 아쉬움은 전혀 없었고, 그냥 재미있었다. 교수님은 자기가 쓴 글을 한번 읽어보라고 하셨다. 의외로 말이 되는 글이지 않느냐고 하셨는데, 실제로 그랬다. 글은 더듬더듬 끊어지면서 시작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의외로 말이 되는 문장이 되어 있었다.      


교수님은 일단 쓰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서 설명하셨다. 전문 작가들도 빈 종이 앞에서 막막함과 두려움을 느낀다고, 그리고 그 두려움은 쓸 때에만 사라지는 법이라고. 일단 시작하고 나면 글은 어떻게든 이어지기 마련이니 너무 겁먹지 말라는 말씀이었다.     


그러고보니 김영하 작가도 교수 시절에 비슷한 활동을 해본 적이 있다고 했다. “나는 용서한다.” 라는 문장으로 글을 써보게 시켰다고. 학생들은 첫 문장의 힘을 빌려 무섭게 글쓰기에 몰입하기 시작했는데 누군가는 쓰면서 울기도 했다고 한다.     


그렇다고 해도 막상 아무거나 쓰려면 쉽지 않다. 결국 글은 말이고, 말에는 의도가 있어야하기 때문이다. 하고 싶은 말이 없는데, 어떻게 한 편의 글을 쓸 수 있다는 말인가. 웬만한 달변가도 처음 만나 어색한 사람 앞에서는 제 기량을 발휘하기 어렵듯이, 할 말 없는 때 뜬금없이 글 쓰는 일도 쉽지만은 않다.


나는 영화를 보면 왓챠에 꼭 별점과 코멘트를 남겨두곤 하는데, 거기엔 웬만한 개봉영화마다 헛소리 리뷰를 꾸준하게 달아놓는 것으로 꽤 유명한 사람이 있다. ‘의식의 흐름’이라는 아이디로 리뷰를 남기는 그는 영화 제목에서 떠오른 단상을 의식의 흐름대로 이어서 생뚱맞게 던져놓는다.      


<애드 아스트라>라고 하니 유치원 시절 셔틀버스가 생각난다. 어릴적 셔틀버스가 오지 않아서 어머니가 유치원에 데려다 주셨다 …<중략>… 뒤도 안 돌아 보고 유치원을 나섰다. 나섰다는 표현에서 이번 추석이 생각난다. 고스톱을 치고 싶었는데 이모부가 “나 섯다 고수야”라고 말씀하시며 화투판을 섯다판으로 바꾸셨다. …<후략>…     


뭐 이런 식으로 정말 의식의 흐름대로 아무 소리나 막 연결해 나간다. 파격 속에서도 문장력이나 구성 같은 게 치밀해서 무릎을 치게 만드는 감각은... 아니지만 그냥 그 익살이 귀여워서 한번 풋 하고 웃게 만든다.      


어쩌면 그야말로 나의 교수님이 옛날에 말씀하신 것처럼 ‘걱정 않고 일단 쓰기’를 묵묵하게 실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적어도 글쓰기를 대하는 그 이완된 태도만큼은 배울만한 것 같다. 떠오르는 대로 술술술 쓰다보면 결국 어떤 에피소드가 떠오르기 마련이고, 그 에피소드를 말이 되게 연결하다보면 한편의 글이 된다는 것.     


의식의 흐름이든, 스탑워치든, 주어진 첫 문장이든, 이것저것 동원하면서 내 안에 숨어있는 이야기들을 발견해나가는 것이 글쓰기가 아닐까한다.


사실 두 달쯤 전에 삼십만 원 가까이 하는 키보드를 샀는데, 타이핑할 때의 감각이 너무 좋아서 틈만 나면 자꾸 뭔갈 쓰고 싶다. 오늘도 키보드를 막 두드리고 싶었는데, 딱히 할 말도 없고 해서 아무거나 써본 것이다.


마지막 문장을 쓰는 일이 늘 어렵다. 교수님께 글을 시작하는 방법은 배웠는데, 끝내는 법은 배우지 못해서인 것 같다. 글의 결론은 나의 소관이 아닌 것도 같다. 시작하면 대개는 제멋대로 흐른다. 오늘 같은 경우도 그렇다. 나도 모르는 사이, 시작하는 것의 만만함으로 시작해서 끝맺는 것의 어려움을 깨닫게 된 글이 되어버리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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