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댐 Aug 27. 2020

예고편을 보아서는 안 된다

- 영화 감상 꿀팁

1318편, 내가 살면서 지금까지 봐온 영화의 수다. 올해만 현재까지 86편을 보았다. 재작년에는 200편이 넘는 영화를 보았으니 이것도 많이 줄은 편이다. 영화에 흥미를 붙이면서, 많은 변화가 생겼다. 나는 이제 세상을 하나의 거대한 ‘이야기’로 이해한다. 사람도 걸어 다니는 이야기로 보인다. 세상의 모든 이야기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되었다. 이런 변화가 나는 마음에 든다.


개봉하는 영화보다 지나간 영화들을 더 많이 보는 편이기 때문에 내가 본 영화 중에는 좋다고 알려진 명작(혹은 문제작)이 많다. 지난 영화들을 보는 것의 장점은 좋은 영화를 만날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쭉정이 같은 영화들은 자연스럽게 도태되며 사라져서 그걸 찾아볼 기회조차 생기지 않는다. 언제나 오래 남는 것은 좋은 것들이다. 클래식 음악이나, 명화, 고전문학이 그렇듯이.      

 

영화를 많이 보다 보니, 대중적인 상업영화뿐만 아니라 다양성영화(이른바 독립영화)에도 자연스레 관심이 생겼다. 어린 시절 ‘저런 영화는 도대체 누가 보는 거야?’ 했던 바로 그런 영화들이다. 영화를 좀 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상업영화를 계속해서 보다 보면, 어느 순간 내가 같은 영화를 반복해서 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미묘하게 껍데기는 바뀌었지만 조금도 예측에서 벗어나지 않는 기분. 그런 영화를 보고 나면 2시간을 낭비한 것 같을 뿐만 아니라 ‘당한’ 기분까지 들게 된다. 그에 비해 다양성영화들은 대체로 투박하지만 고유한 이야기를 한다. 촌스럽지만 말주변 좋은 친구 같다. 첫 만남에서 학창 시절 밴드 했던 얘기를 늘어놓는 소개팅 상대녀 같이, 신선함이 있다.    

 

아무튼 그렇게 많은 영화들을 몰아보면서 영화를 좀 더 재미있게 관람할 수 있는 나만의 방법들도 자연스럽게 터득했다. 이건 어쩌면 재미있게 보는 방법이라기보다는, 재미없게 보지 않는 법에 가깝다. 그건 ‘예고편을 보지 않는 게 좋다’는 것이다. 솔직한 심정은 ‘안 보는 게 좋다’ 정도가 아니라 ‘절대 예고편을 보아서는 안 된다’ 쪽이다.        


예고편을 보아서는 안된다. 덧붙이면 줄거리도 미리 보지 않아야 한다. 이 세상의 연출자는 예고편을 보거나 줄거리를 알고 극장에 온다는 전제로 영화를 만들지 않는다. 영화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알고 극장을 찾을 것이라는 상상으로 시나리오를 쓰는 사람도 없다. 이야기는 고도로 예민하게 계산된 세계다. 작가는 거대한 스토리를 펼쳐내기 위해서 앞부분에 매우 공을 들이고, 정보를 제한적으로 공개하며 관객(혹은 독자)을 끌어들인다. 주인공에 이입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과 정보를 주고, 그 주인공을 곤란에 빠뜨리며 관객과 세트로 궁지에 몰아넣는다. 우리는 영화 속 주인공과 같은 속도로 그 역경을 이겨내야 한다.      


하지만 예고편을 보거나 줄거리를 알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내가 알고 있는 정보와 영화에서 펼쳐지는 정보가 어긋난다. 내가 아는 것, 익숙한 것이 나올 때까지 가려진 정보는 일종의 ‘불편함’이 되어 몰입을 방해하기도 한다. 스토리 자체를 오해하거나, 장르를 자의적으로 예측하여 이해에 어려움을 겪게 되기도 한다. 예고편에는 특히 돈을 가장 많이 쏟아붓거나 공들인 유머가 등장하는 장면이 배치되기 때문에, 정작 영화관에서는 그 짜릿함이 반감되는 경우가 생긴다. 이러한 이유로 나는 예고편이나 줄거리를 미리 알고 가는 것에 부정적이다. 예고편이나 줄거리가 감상에 도움 되었다고 느껴본 적이 한 번도 없으며, 들어본 바도 없다.     


영화 <캐롤>을 처음 보던 때를 기억한다. 케이트 블란쳇과 루니 마라가 열연한 이 영화는 굉장히 유명한 퀴어 영화이지만, 나는 그 사실뿐만 아니라 그 어떤 정보도 모른 채로 보았다. 백화점 점원인 루니 마라와 부유한 케이트 블란쳇이 우연히 만나 서로에게 서서히 빠져들고, 마약처럼 취해서 스킨십을 나누고, 불꽃이 튀듯 싸우고 경멸하는 그런 전쟁 같은 사랑을 나는 실시간으로 혼란해하며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예상하지 못한 상태로, 그들의 눈빛, 말투, 감정에 시시각각 주목하며 그들의 속도로 빠져들었다. 그 둘이 이별하고 한참 후에 우연히 다시 만나 시선이 교차하는 엔딩씬에서는 그들과 완전히 하나가 되었고, 심장은 온통 들썩거렸다. 내가 미리 영화의 장르를 알았다면, 줄거리를 알았다면 절대 알지 못했을 기분이었다. 그 이후로 나는 되도록 영화의 제목과 감독, 배우를 제외하면 어떤 것도 미리 알지 않고 관람한다. 이렇게 하면 어설픈 영화도 꽤나 재미있게 감상할 수 있다.       


아니, 그렇다면 예고편도 없이 어떻게 영화를 볼 수 있다는 말인가. 광고성으로 요약된 줄거리도 모르고 어떤 영화를 어떻게 볼지 또 어떤 기준으로 선택해야 할지 알 수 있단 말인가. 이렇게 물을 수도 있겠다. 나의 대답은, 그래도 보지 않는 편이 낫다는 것이다. 제목과 포스터 정도만 보면 된다. 영화를 끊임없이 보면서 나에게 감동을 주었던 감독들을 기억하고, 그들의 차기작 위주로 골라 보면 된다. 나에게 평균 이상의 만족을 주었던 배우들을 신뢰하고 선택하면 된다. 영화를 많이 보지 않아 제대로 아는 감독도, 배우도 없다면 제목도 포스터도 애매할 뿐이라면, 일단 여러 번 실패하고 후회하면서 서서히 안목을 키워 가면 된다. (물론 무조건 그래야 한다는 것은 아니고, 하나의 제안이다.)     


덧붙여, 영화관에서도 상영 전에 다양한 영화들의 예고편이 소개되기 때문에, 웬만하면 상영시간보다 7분 정도 늦게 들어가서 노출을 최소화하기를 권한다. 사람들을 뚫고 자리에 앉는 것이나, 급하게 자리를 찾아야 하는 일이 번거로워도 어쩔 수 없다. 좋은 이야기를 온전히 느끼려면 그 정도 노력은 해야 한다. 아, 그리고 이 글에는 예고편을 보면 안 된다는 팁 외에도 한 가지 함정이 더 있다. 영화 <캐롤>의 핵심적인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좋은 영화를 제때 챙겨보지 않으면 이렇게 스포일러를 당할 수 있다는 것도 꼭 마음속에 새겨두시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