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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댐 Dec 04. 2020

내언니전지현과 나 그리고 나

영화, <내언니전지현과 나> 리뷰

*


잔잔한 발성으로 섬세한 노래를 하던 오디션 참가자에게 양현석은 다소 지루하다는 평을 쏟아냈다. 박진영, 양현석의 탈락표로 탈락이 확정된 참가자에게 세 번째 심사위원이었던 유희열은 앞의 조언이 현실적이라고 인정하면서도, 흔들리지 않고 말했다. “그런 노래도 있어야죠.”     


양현석이 다시 말했다. “그런 노래를 콘서트에서 스무 곡을 부른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진중하게 내뱉은 유희열의 말이 나는 오랫동안 잊히지 않는다.

“저희 회사에, 그렇게 노래를 스무 곡 씩 하는 친구가 있어요...”      


“하지만  속삭이는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앉아계시는 분들도 생각보다 꽤 많아요.”


*


<내언니전지현과 나>는 오랜 시간 방치되어 폐허가 되어버린 게임 속에 아직도 남아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주인공이자 감독인 ‘박윤진’은 대표 망겜으로 불리는 ‘일랜시아’ 게이머이다. 이 게임에는 이미 오래전부터 패치도 없고, 운영진도 없는 상태. 그렇다고 소수의 사람들이 왁자지껄 의기투합하는 모양새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대부분의 유저들은 각종 매크로로 거의 로봇과 같은 플레이를 일삼는다.      


그럼에도 몇몇은 남아있다. 루시드폴의 지루한 노래를 스무 곡씩 듣기위해 앉아있는 사람들이 있는 것처럼. 지루하고 방치된 게임 속에서도 나름의 의미를 가지고 행복을 느끼며 플레이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차갑고 냉정한 현실과 달리 일랜시아에는 내가 맛볼 수 있는 최소한의 성취가 안정적으로 보장됩니다.’ 박감독의 친동생(그도 일랜시아 골수 게이머다.)이 내뱉는 말을 요약하면 이런 식인데, 씁쓸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현실이라는 곳이 얼마나 경쟁적이고 날카로운 세상인가. ‘현실 매크로’로 계급 피라미드의 꼭대기를 독차지하는 사람들이 득시글한데, 일랜시아는 루트만 따라가면 크게 뒤쳐질 일도 없다.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죽더라도, 아무 상관이 없다. 그들은 마음 놓고 절벽에서 뛰어내려 장난처럼 자살한다. 얼마든지 리셋이 가능한 세상까지는 아니라도 재도전의 기회가 있는 세상이 우리에게는 필요하다는 생각을 잠깐은 해보게 된다.     


영화 속에서 문득 감동적이어서 눈물이 날 뻔 했던 장면이 있다.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다. 음성기능이 없는 일랜시아에서 노래 부르기를 즐기는 게이머가 나온다. 그게 어떻게 가능하냐면, 그냥 가사를 채팅창에 치는 것이다. “쫓고 쫓기는 게 우리 인생. 개만도 못한 것이 노비의 생…” 그렇게 노래 가사를 타이핑하면, 옆의 청중들은 박수를 치고 칭찬의 말을 건넨다. ‘잘 부른다.’고 한다. 행인도 길을 가다 멈춰서서 노래를 듣는다. 정확히는 노래 가사를 눈으로 읽는 것이겠지. 가수가 “님 뭐하세요.” 묻자, “노래 들어요. 님 노래 하는 거.” 대답한다.
 

나는 거기서 그냥 짠해졌다. 그러니까, 밖에서 보면 얼토당토않은 소꿉장난일 뿐인데 그걸 허용하는 여유랄까. 어떤 따뜻함, 존중 같은 게 느껴져서. 시큰한 코를 괜히 한번 찡긋거렸다.      


누군가에게는 아주 사소하고 쓸모없어 보이는 일을, 이렇게 뭉클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에 존경을 표한다. 어쩌면 딱 2~30대만이 완벽하게 공유할 수 있는 감동일 텐데, 이 영화의 약점이라기보다는 강점에 가깝다. 일랜시아 초기 기획 개발자가 자신의 ‘바람의 나라’ 추억을 얘기할 때도 그렇다. 새벽 두시에 동시 접속자가 10명 남짓한 동굴에서 우연히 만난 누군가와 밤새 사냥을 하며 친해졌다고.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어기게 될까봐 망가진 부품을 급히 사서 뛰었다고. 나는 게임 태동기의 추억이 우리나라 80-90년대생 만이 공유할 수 있는 고유한 감성이라고 생각한다. 조악한 그래픽을 통해 간신히 만난 사람들과의 순수한 연결. 투박한 소통. 그런 것들은 분명 우리 세대만의 추억일 것이다.      


그리고 문득 영화관을 슬쩍 둘러보았을 때, 나를 포함해 8명의 관객이 있었다. 지루한 노래를 듣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여전히 있고, 방치된 망겜을 하는 사람들도 여전히 있고, 이런 영화를 보러 극장을 찾는 사람들도 여전히 있다는 사실이 나에게는 조금 희망적으로 다가왔다.     


누구나 지키고 싶은 소중한 것이 있다. 초라하고 낡은 것이지만 나에게는 고유하고 진실된 의미로 다가오는 것들이 있다. 폐허가 된 게임 속에서도 정을 나누는 사람들을 보면서 생각했다. 스트리밍 구독 서비스로 영화의 판도가 바뀌어가는 이 흐름 속에서, 세상 모든 영화관이 하나 둘 사라지고, 영사기와 스크린으로 영화를 보는 일이 구닥다리가 된다고 해도. 나는 어두운 극장의 의자에 앉아서 마지막까지 영화를 보는 사람이리라는 것을.      


그들이 일랜시아에 남아있는 것처럼 나도 극장에 남아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그들의 여정이 더 깊게 와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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