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욱-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있다. 처음에는 스크린(또는 모니터)의 영상과 내가 분리되어 있다. ‘누군가가 공들여서 무엇을 만들었구나.’ 와 같은 생각으로 낯선 인물과 소리들을 받아들인다. 조금 겉돈다. 영화는 보통 처음부터 어떤 사건이 덜컥 주어지는데, 그리 친절하지 않은 영화가 대부분이므로 내 입장에서는 대체로 혼란스럽다. 모르는 사람들이 나와서 모르는 공간에서 내가 모르는 이야기를 한다. 그러다보면 하나 둘씩 전말이 드러나고, 앞뒤가 연결되고, 관계가 이해되기 시작한다. 주인공은 난관에 부닥치고 그 안에서 헤맨다. 나른한 침대에 누워서 잠을 청하다가 나도 모르는 새 덜컥 잠에 빠져드는 것처럼. 영화관에 앉은 나는 영화 속으로 빠져든다. 알아차리지도 못하는 찰나 ‘수욱-’하면서 빨려 들어간다.
이야기에 완전히 빠져들어 꿈을 꾸는 것 같은 기분을 느낄 때가 좋다. 언제부터인가 영화를 틀어놓으면 쉽게 집중하기 어려워서 중간 중간 핸드폰도 보고, 스트리밍으로 볼 때는 아예 꺼버리기도 하고, 잠깐 멈춰놓았다가 한참 뒤에 다시 보는 경우도 생겼다. 성인 ADHD가 아닐까. 불안한 마음에 여기저기 얘기해보았더니 사실은 거의 대부분이 그렇다고 했다. “영화 왜 안보세요?” 내가 물었을 때 “저는 두 시간 동안 집중 못하겠더라고요.”하는 사람들 엄청 많아서, 나름대로 안도했다. 나만 그런 건 아니구나.
하지만 좋은 영화는, 필시 사람을 그렇게 수욱- 빨아들인다. 주인공과 나를 중간에서 하나로 합쳐놓고 같이 고민하고, 같이 긴장하고, 같이 슬퍼하고, 같이 기뻐하게 한다. 모든 결말이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튼 무엇인가 같이 해냈다는(혹은 견디어 냈다는) 기분을 느끼게 해준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오면 내 삶이 조금 더 확장된 기분이고, 언제나 그렇듯이 묵직한 뿌듯함이 다가온다.
언제나처럼 영화와 함께하면서 셀 수 없이 감동했던 한 해 였다. 코로나19로 조심스러운 분위기였지만 영화관만큼은 꾸준히 찾았다. 이를 두고 누군가가 비난할지라도 할 말은 없다. 마스크를 잘 쓰고, 거리두기를 신경 썼다는 점은 힘주어 밝힌다.
올 해 좋은 영화들이 꽤 많았는데, 어려운 시국과 겹쳐 더 널리 소개되지 못한 것이 씨네필로서 아쉬웠다. 걸출한 한국 영화들이 많았다는 생각이다. <몽마르트 파파>, <하트>, <야구소녀>, <남매의 여름밤>, <찬실이는 복도 많지>, <내언니전지현과 나>, <밥정>같은 한국영화들은 완성도나 대중의 평가와 무관하게 더없이 소중했다.
얼마 전 따로 적은 바 있듯이 2021년 올해는 영화 편수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을 생각이다. 새로운 영화를 봐야한다는 강박이 너무 컸다. 다시 보고 싶은 영화들이 많았었는데, 그러지를 못했다. 올해는 편수나, 의무감을 완전히 내려놓고 ‘보고 싶은 영화’만을 보기로 했다. 올 초에 2019년 본 영화들을 정리하면서, “2020년에도 영화 많이 봐야지.”했는데 실제로 많이 본 것 같다. 2021년에도 좋은 영화를 많이 만났으면 좋겠다. 무엇보다 코로나19가 일단락 돼서 극장 가기 좋은 시절이 다시 열리면 좋겠다.
커버 사진은 올 한 해 본 영화 중에 가장 인상 깊었던 영화. 사프디 형제 감독의 <언컷 젬스>
(가장 좋았던 영화는 <아노말리사>,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팬텀 스레드>,<카지노>,<결혼이야기>,<카이로의 붉은 장미> 등이었으나, <언컷 젬스>에 유난히 정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