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직원이 지난 15년 동안 회사를 위해 아주 많은 공헌을 해왔는데, 지난 1년 동안의 업무 실적은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했다. 앞으로 업무 수행 능력이 더 향상될 가능성이 없는 상황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a. 그가 과거에 회사에 공헌한 바나 그의 나이와는 상관없이 업무 수행 능력만을 고려하여 그를 해고할 것이다. b. 그간의 공헌을 고려하여 회사가 그 사람의 인생에 어느 정도 책임을 져야하므로 해고해서는 안 된다.
이 질문에 대하여 미국인과 캐나다인의 75% 이상이 a를 선택한 반면(유럽권 국가에서도 비슷했다.), 한국인과 싱가포르인의 20%, 일본인은 30%만이 a를 선택했다고 한다. *
어쩔 수 없는 한국사람인지 나도 b를 선택했다.
그리고 저 문제를 접한 대다수의 사람들이 b를 선택했을 것이라고 예상한다. a를 선택한 사람이라도 b가 엉터리 선택지라고만은 생각하지 않을 것 같다. 어째서 같은 질문에 동양과 서양이 극명하게 다른 답을 내놓았을까? 동양과 서양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그만큼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페어웰>은 동서양의 가치관이 충돌하는 지점에서 가족을 말하는 영화다. 할머니가 암에 걸려 시한부 선고를 받았는데, 이를 할머니에게 알려줄 것인지, 말 것인지를 두고 논쟁이 벌어진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 논쟁이 50:50으로 아슬아슬하게 부딪히는 것이 아니라 99:1로 균형이 무너져 있다는 점이다. 할머니에게 병을 알려야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주인공 ‘빌리’가 유일하다.
주인공인 빌리는 국적만 중국인 미국사람이다. 하드웨어는 중국인이지만 소프트웨어는 완전히 미국인이다. 그녀는 미국에서 미국사람들과 함께 자랐다. 그곳에서 공부했다. 그녀의 부모님을 포함해서, 중국에 살고 있는 친척들과는 사고방식 자체가 이미 너무 달라진 상태다. 개인을 중시하는 서양과, 집단을 중시하는 동양의 관점이 할머니의 임박한 죽음으로 인해 강제로 부딪히게 된다.
미국의 어머니들은 자녀와 함께 놀이를 할 때 특정 사물에 초점을 맞추고 그 사물의 속성을 아이들에게 가르친다고 한다. “이건 차란다. 차 좋아 보이지? 바퀴가 아주 멋있지?” 동양의 어머니들은 같은 장난감을 두고도 다른 방식으로 놀이한다. “자 여기 봐, 부릉 부릉! 차를 너에게 줄게. 이제 다시 엄마에게 줘 봐!” 사회적 관계나 예절에 관련된 말들을 많이 한 것이다. **
이러한 차이로 인해 서양의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세상이 독립된 ‘사물’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하고, 동양의 아이들은 세상이 사물과의 ‘관계’를 통해 이루어진다고 생각하게 된다. 어릴 때부터 부모와 떨어져서 잠자는 서양에서는 개인주의가 자연스럽고, 가족의 품에서 끊임없는 유대와 함께 성장하는 동양에서는 개인주의가 다소 약화될 수밖에 없다.
시한부 선고를 받은 할머니에게 그 사실을 알려야 하는가? 이를 말하지 않기로 결정했다는 빌리 가족의 선택에 대해서는 각자 생각이 다를 수 있겠으나, 적어도 한국에 사는 우리 대부분은 ‘왜 이야기하지 않는지 이해는 가.’하고 생각할 것이다.
<페어웰>은 로튼토마토 신선도 지수 98%를 기록하고 있다. 초창기에는 100%였다. 그 말은 곧, 기가 막히게 참신한 영화라는 뜻인데, 그 사실을 알고 영화를 보면 오히려 실망할 수도 있다. 우리에게는 그렇게 신선하게 느껴지는 이야기가 아닐 수도 있으니까. 이건 마치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을 바라보던 한국 관람객들의 감상과도 비슷한 맥락이다. 여주인공이 재벌 2세를 만나 시어머니의 핍박을 받다가 결혼에 골인한다는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진부한 막장드라마일 뿐이었지만, 외국에서는 어썸!한 문제작이었던 것처럼. 서로 다른 문화권에서는 신선함의 척도마저도 달라진다.
이 영화의 재미있는 지점은 어쩌면 그 방면에서 온다. 서양권 관람객들이 중국 가족을 그저 신선한 문화충격으로 느낀다면, 우리는 보다 중립적인 시선으로 양 측의 감정을 헤아리며 감상할 수 있다. 알리자고 말하는 빌리와, 알리지 않겠다는 가족들에 모두 공감하면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가족을 사랑하는 방법에 대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이야기는 감독 룰루 왕이 자신이 실제 겪은 할머니와의 일화를 기반으로 썼다고 한다. 바다 건너까지 전해지는 할머니의 사랑과, 그런 할머니를 생각하는 손녀의 애틋함은 그래서인지 더 짙은 여운으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