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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댐 Oct 06. 2020

피동

- 후각

이상은 말했다. ‘거울 속에는 소리가 없소. 이렇게까지 조용한 세상은 참 없을 것이오.’ 그의 말대로 거울 속에는 오로지 형태만 있다. 거울 속에서 나는 소리도 없고, 거울 속에서 나는 냄새도 없으며, 거울 속의 무엇도 만질 수 없고, 어떤 것도 맛볼 수가 없다. 우리가 거울 속의 세상에 관심을 두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무미건조하게 반사된 이미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기 때문이다.


영화는 조금 다르다. 우리는 거울을 볼 때와는 사뭇 다른 실감으로 영화를 감상한다. 그것이 이야기의 힘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선명하게 그 차이를 느끼게 하는 것은 엄연한 소리의 존재다. 거울에 비친 모습들이 영화와는 비교할 수 없는 화질로 나타나는데도 우리는 거울 속의 내가 따로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에 반해 영화 속의 장면들은 완전히 가공된 것임에도, 살아 움직이는 듯한 독립적이고 고유한 세계로 느껴진다. 실감은 소리에서 온다.


거울과 영화를 소리의 존재로 구분할 수 있는 것처럼 인생과 영화도 냄새의 존재로 구분할 수 있다. 삶에는 냄새가 있다. 후각은 독특한 피동의 감각이다. 맛보고 만지는 의지의 결과가 아니라, 불현듯 당하는 감각이다. 사진을 찍거나 녹음은 할 수 있어도, 냄새를 기록할 수 없다는 것은 놀랍다. 추한 것과 아름다운 것이 늘 섞여있다. 쉽게 만들 수도, 없앨 수도 없다. 우리는 현재를 보는 것으로 파악하고, 듣는 것으로 실감하며, 냄새로 완성시키는 것은 아닐까.


나는 영화에 냄새가 없음을 다행으로 생각한다. 좀비 냄새를 맡으며 좀비 영화를 본다면 남는 것은 트라우마일 테니까. 냄새 없는 영화의 세상은 그래서 미추(美醜)의 평균치를 유지하게 되는 것 같다. 아주 아름다운 것은 냄새의 부재로 덜 아름다운 것이 되고, 덜 아름다운 것은 꽤 아름다운 것이 된다. 아주 끔찍한 것은 덜 끔찍한 것이 되고, 별로 안 끔찍한 것들이 끔찍하게 보이기도 한다.


미디어가 눈부시게 발전한 것에 비해 냄새의 영역은 중세 유럽의 방식과 별달리 달라지지도 않았다. 인간은 냄새를 만들어내는데 여전히 서툴고, 인공의 냄새들은 향수와 방향제처럼 공간을 압도적으로 지배하다가 힘없이 사라진다. 매 순간 현현하게 존재하고 자취를 감추는 ‘냄새’는 그래서 책갈피 같다. 고유한 추억을 마음으로만 기억할 수 있는 것처럼 냄새도 그러하다. 냄새는 언제나 추억과 깍지 끼고 잠잔다.


아침 냄새, 밤 냄새, 비 냄새, 바다 냄새, 풀 냄새. 정의할 수 없는 이 복합적인 냄새에도 아련한 추억이 있다. 엄마 베개 냄새, 지난 연인의 살 냄새를 여전히 기억한다. 집집마다 다르던 친구 집 냄새와, 훈련소에서 아침마다 연병장에 퍼지던 물먹은 목재 냄새. 할머니집 홈키파 냄새와, 놀이공원 츄러스 냄새, 사촌 동생 어릴 적의 젖비린내와 달고나 만들다 태워먹은 국자냄새도 저마다의 사연으로 쌓여있다. 내 의지로 막아낼 수 없는 향기가 이렇게나 오래 남는다.


이문재는 자신의 시 「소금창고」에서 ‘옛날은 가는 게 아니고, 이렇게 자꾸 오는 것이었다’고 썼다. 나의 옛날 또한 지나가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그때에 있다가 자꾸만 재생된다. 그에게 옛날을 소환해낸 감각이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나의 경우에는 한 줌의 냄새가, 그 피동의 감각이 과거를 자꾸 이리로 불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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