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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댐 Sep 19. 2020

파랑색 맛

- 삶의 향미

저는 ‘파랑색 맛’을 좋아합니다. 그 왜 있잖아요. 파랑색 젤리나 파랑색 음료수, 파랑색 아이스크림에서 나는 그 인공적인 맛이요. 그 맛의 정체는 뭘까요? 처음 만든 사람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맛을 만들어내서 팔았을까요. 만들어놓고는 사장님한테 무슨 맛이라고 설득했을까요. 저는 또 왜 알지도 못하던 그 맛을 납득하고서 이렇게 좋아하게 돼버린 걸까요? 궁금합니다. 그러고 보면 파랑색 맛은 파랑색 맛이라고밖에 표현할 수가 없는 것 같습니다. 제가 옛날에 좋아하던 어떤 아이스크림은 바로 그 ‘파랑색 맛’이 나는 아이스크림이었는데요, 거기에는 놀랍게도 그 맛의 정체가 적혀있었습니다. ‘시원한 블루 아이스’ 맛이라고요. 어린 나이였지만 저는 그때도 장난하자는 건가 싶었어요. 블루 아이스가 뭔데 블루 아이스 맛이라는 거여. 아픔을 고통으로 설명하고 고통을 아픔으로 설명하는 기분이었습니다.


어떤 음료수에도 파랑색 맛은 나름대로 정의되어 있었습니다. 근데 거기서는 ‘스포츠 맛’이라고 하더군요. 이건 거의 철학적인 문제 아닙니까? ‘스포츠에도 맛이 있는가’부터 시작해야겠죠. 맛이 있다고 친다면 누가 처음 맛보았고, 어떻게 검증할 수 있는지도 궁금해질 겁니다. 왜 하필 파랑색이어야 하는지도 따져봐야 될 거고요. 끝이 아닙니다. 파워에이드의 파랑색 맛은 공식 명칭이 ‘마운틴 블라스트’라고 하는데요. 마운틴이 산이고, 블라스트가 폭발 혹은 강한 바람이라는 뜻이 있으니까, 대충 ‘산폭발맛’ ‘산바람맛’이 됩니다. 이렇게 파랑색 맛이 난해합니다. 그냥 심플하게 파랑색 맛이라고 하는 것이 그나마 혼란을 줄이는 방법이 아닐까 합니다.


아무튼 이렇게 풀리지 않는 의문 속에서도 저는 파랑색 맛을 좋아합니다. 젤리도 파랑색 맛을 좋아해서 제일 먼저 먹거나, 아꼈다가 제일 마지막에 먹고요. 아이스크림도 파랑색 맛 좋아하고요. 게토레이나 포카리스웨트보다 파워에이드 ‘산바람맛’을 좋아합니다. 엄청 고급진 맛도 아니고, 엄청 싸구려틱한 맛도 아니거든요. 묘하게 세련되면서도 숨길 수 없게 뿜어져 나오는 싼마이 감성이 파랑색 맛의 독특한 매력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쯤 되면 저는 맛이라는 것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됩니다. 사실 맛이라는 건 단맛, 짠맛, 신맛, 쓴맛. 네 가지밖에 없다잖아요. 어디 가서 매운맛도 맛이라고 하면 ‘그건 맛이 아니라 통각에서 느끼는 고통이야!’ 라고 열 내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맛이 아니라는 매운맛까지 쳐도 다섯 가지밖에 안 되는 거예요.


알다시피, 파랑색 맛은 결국 단맛을 꾸미는 ‘파랑색 향’이 그 정체겠지요. 코 막고 먹으면 포카리든 파워에이드든 게토레이든 구분이 되겠습니까. 우리는 향과 맛을 구분하기는 하나요. 구분한다고 생각만 하는 것 같습니다. 조선시대에는 파랑색하고 초록색을 구분하지 않고 푸른색이라고 불렀잖아요. 영어에서도 Flavor라는 단어를 흔히 쓰는걸 보면, 사람들은 너무나 당연하게 맛과 향을 뭉뚱그려서 맛이라고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살면서 향과 맛이 구분되지 않는 경우는 많습니다. 좋고 나쁜 것이 미각이라면, ‘왜’ 좋고 ‘어떻게’ 나쁘고 하는 구구절절한 사연들이 향일 것이고, 그 사연들과 해석이 합쳐지면 비로소 추억이 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저의 경우에는 그렇습니다. 지난 일들을 다시 돌이켜보면서 자주 헷갈려 합니다. 그때의 시간들은 좋았던가, 나빴던가. 갈팡질팡한 밤이 자주 찾아옵니다. 삶의 향미를 가늠하는 일은 파랑색 맛이 향인지 맛인지, 그 정체가 무엇인지 구분할 수 없는 것처럼 어렵기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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