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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댐 Nov 11. 2020

영화강박증

- 나의 이상한 영화강박증

대학교를 졸업할 즈음부터 영화에 완전히 빠져버렸다. 뒤늦게 유명한 영화들을 몰아보기 시작했고, 유명한 영화들만 찾아서 보다보니 실패할 일도 없어서 더 흥미가 생겼다. 1년에 200편을 훌쩍 넘긴 해도 있었다. 그때는 지하철을 타고 가면서도 영화를 봤고, 흔들리는 고속버스에서도 영화를 봤다. 시간이 날 때마다 영화를 보고, 글을 썼다.


한 분야에 깊이 심취하다보면, 특유의 디테일을 가늠할 수 있는 눈이 생긴다. 해설자들이 내가 절대 알 수 없는 바둑판의 묘수들을 찾아내는 것처럼, 와인 전문가들이 색깔과 향만으로 포도의 품종과 산지를 알아맞히는 것처럼. 나도 숱한 영화를 보면서 자연스럽게 연출이나 각본, 연기의 디테일을 찾아낼 수 있게 되었다.


그저 재미있는 영화로 충분했던 나는 이제 연출이나 촬영, 음악, 캐스팅, 각본의 결을 어루만지며 감상한다. 이런 심미안은 때로는 영화에 깊이 몰입하지 못하고 멀찍이서 비평하듯 바라보게 만들기도 하지만, 대체로는 영화를 깊이 있게 음미하는 데 도움을 준다.


새로운 감독의 새로운 영화들을 볼 때마다 나의 영화지도는 점점 더 넓어졌다. 좋은 영화와 나쁜 영화를 구분할 수 있게 되었으며, 나만의 고유한 영화관(映畫觀)도 생겼다. 상업영화에서 예술영화로, 장르영화부터 다양성 영화까지 취향도 넓어졌다.


그런데 이것이 문제였다. 보고 싶은 영화로 가득했던 나에게 어느 순간 영화가 의무감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이다. 세상에 봐야 할 영화가 너무 많은 것이 문제였다. ‘죽기 전에 봐야 할’이라는 수식어로 대표되는 수많은 명작들은 물론이고, 당대의 주목을 빨아들이는 흥행작들, 영화광들 사이에서 ‘충격적인’ 혹은 ‘파격적인’이라는 찬사가 붙는 문제작들, 확고한 스타일로 고정 팬을 몰고 다니는 천재 감독들의 작품까지. 해치워야 할 영화들이 너무나 많았다.


많은 것뿐만 아니라, 잠시만 고삐를 늦춰도 수없이 개봉하며 쌓이는 탓에 언제부터인가 숙제하듯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왓챠에 영화 평점과 코멘트를 차곡차곡 쌓아나가는 것도 처음에는 즐거움이었으나 이제는 어떤 강박처럼 작용한다.


나는 무슨 영화인도 아니면서, ‘아 이번 달에 00편은 봐야 되는데...’ 하는 혼잣말을 자주 한다. 올해는 현재까지 100편을 좀 넘겼는데, “조금만 더 보면 올해 120편은 채울 수 있겠어요.” 라는 말을 주변에 내뱉으면서 문득 아찔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기대하는 것도 아니고, 바라는 것도 아닌데 혼자서 이러고 있다는 게 너무 우스웠다. 웃음이 쿡쿡 터지는 우스움이 아니고, 어이없고 난감한 우스움이었다.


사실 올해는 정말 다시 보고 싶은 영화들이 많았다. 비포3부작(비포선라이즈, 비포선셋, 비포미드나잇)도 다시 한 번 돌려보고 싶었고, <걸어도 걸어도>, <매그놀리아>, <라라랜드>, <밀리언 달러 베이비>, <127시간>, <위플래쉬>, <매드맥스>, <아사코>, <쓰리빌보드> 같은 내 마음속 만점 영화들도 다시 한 번 보고 싶었다. 개인적으로 사랑해 마지 않는 <댄 인 러브>나, 가슴 속을 깊숙이 찌르는 듯한 <폭스캐쳐>라든가 <인디에어>, <우리도 사랑일까> 같은 작품도 너무너무 다시 보고 싶었다.(다시 한 번 말하지만 아무도 방해하거나 금지하지 않았다.) 하루 쯤 날잡고 우디 앨런의 영화들을 여러편 돌려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왜냐하면 봤던 것을 다시 볼 시간에 새로운 영화를 한 편 한 편 쌓아 나가는 게 더 중요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나는 올 한 해, 보고 싶은 영화를 두고 별로 내키지도 않는 영화들을 억지로 씹어 삼키듯 보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2021년을 매우 기다리고 있다. 다가올 2021년에는 새로운 영화를 보지 않을 작정이다. 한 편도 안 볼리는 없지만, 아무튼 그러기로 정했다. 2021년에는 내가 좋아했던 영화들을 한번 씩 다시 돌려보면서 처음 볼 때의 마음과 어떻게 다른지를 느껴볼 것이다. 내가 느꼈던 크나큰 감동과 재미를 다시 한 번 느낄 생각이다. 새로운 영화를 봐야 한다는, 그래서 이른바 ‘영잘알’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리라.


누군가는 이렇게 물을 수도 있다. 보고 싶은 영화들을 당장이라도 보면 되지 않느냐고. 옳은 말이지만, 올해까지는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새로운 영화를 쌓아 놓고 싶다. 내년의 시작과 함께 새롭고 유명한 영화를 봐야한다는 이 영화강박증을 던져버리고 마음 편히 사랑하는 영화들을 차근차근 씹어 삼킬 것이다.


그러면서 내 마음속 한 구석에는 이러한 의문도 자리잡는다. 새로운 영화와 절교하고, 좋았던 영화들을 1년 내내 돌려보겠다는 다짐도 또 하나의 강박이 아닐까? 그냥 편한 대로 보고 즐길 수는 없는 걸까. 아무래도 안 되겠구나. 나란 놈은 정말 정상이 아니군. 그런 생각으로 혼자 절레절레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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