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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댐 Nov 17. 2020

양파굽기의 어려움

나는 왜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고기 굽는 법을 차근차근 배우는 사람도 있을까. 사람은 언제부터인가 자신도 모르게 고기굽는 사람이 되는 것 같다.


스무 살 무렵까지는 늘 누군가가 구워주는 고기를 먹었다. 고깃집에 가면 집게를 들 생각조차 않고, 누군가가 굽기를 기다렸다. 고기 먹을 일이 생기면 나보다 나이가 많거나 어른스러운 친구가 한 명 쯤은 늘 있었고, 적당히 눈치를 보다보면 누군가가 집게를 들고 알맞게 고기를 구워주었다. 나는 그냥 묻어갔다. 괜히 나섰다가 핀잔을 듣기도 싫었고 고기를 망치고 싶지도 않았다.


한번은 형이랑 고기를 먹으러 갔었다. 그날도 역시 형이 고기를 구워주었다. 나는 고기 굽는 형에게 “형도 좀 먹어”라고 말만 건네는 정도였다. 한 판을 먹고 나서 고기를 더 시켰을 때 '형 나도 한 번 구워볼래.' 했는데 형은 집게를 휘휘 저으며 거부했다. 나는 머쓱해서, '고기를 굽는 건 고사하고 뭐가 익은 고기인지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형은 급할 것 없다며“여자친구 생기면 저절로 굽게 돼.”하고 대답해주었다.


그리고 형의 말은 사실이었다. 연애라는 걸 하게 되자, 고기굽는 법은 정말 자연스럽게 터득하게 됐다. 어떻게든 자연스러운 척을 하면서 능수능란한 척 고기를 굽다보니, 막상 어렵지도 않았다. 집게로 고기를 들고, 기울여서 고기를 자르고, 익을만하면 뒤집고. 그게 다였다. 별 거 아니었구나. 나보다 어렸던 여자친구는 진심인지 기세워주기인지 모르겠지만 "오빠 고기 잘 굽는다." 했고, 나는 여유있는 척(없었으면서) 싱긋 웃었다. "익은거야?" 여자친구가 물으면 "이걸로 먹어."하면서 노릇노릇한 고기를 올려주었다. 스스로 엄청 자상하고 멋진 남자가 된 것 같았다. 고기 굽는 법을 모르겠다는 여자친구에게 "오빠가 맨날 구워줄게 배우지 마."하는 허세를 떨기도 했다. 악. 느끼해서 턱에 힘이 들어간다.


정식으로 전수를 받은 것은 아니었으나, 고기 스승은 그 이후에 만났다. 같이 알바하던 곳의 동갑내기 친구였는데, 얼굴은 나름대로 되게 예뻤지만 서양식 비만 체형이었던, 그래서 캐릭터가 꽤나 확실했던 여자애였다. 성격도 또렷한데다가 유머러스하기까지 해서 굉장히 매력있던 친구였다. 먹는걸 엄청 좋아해서 근방의 맛집은 꿰고 있었고 알바에서 직급도 높아서 회식 장소는 늘 그 친구의 결정에 따르곤 했다. 우리는 자주 근처의 삼겹살 집에 갔다. 반찬으로 나오는 양념게장이 기가막히게 맛있는 집이었다.


그 친구는 고기를 정갈하게 구웠다. 대충 자르고 대충 올려서 눈대중으로 뒤집던 나와는 달리, 가지런히 3열 종대로 고기를 순서대로 올리고, 순서대로 뒤집었다. 맛도 맛이었지만 보기도 좋고, 사람이 참 차분해보여서 좋았다. 그 이후 지금까지 나는 그 친구의 방식으로 고기를 굽는다. 가지런히 정리해서 올리고, 순서대로 뒤집는다. 절대로 실수할 일이 없고, 누구한테 고기를 잘굽네 못굽네하는 소리를 들을 일도 없다. 무난한 방식이다.


내가 어려워하는 것은. 그리고 고민하는 것은, 더이상 고기굽기가 아니다. 고기굽기보다 훨씬 어려운 것은 단연 양파굽기다. 고기를 태워먹는 일은 드물어도, 양파를 태워먹는 일은 내게 너무나 흔하다. 먼저, 잘 안익는다. 고기가 얼추 익어갈때까지 양파는 안에서 계속 촉촉한 수분을 내뿜으며 노릇해질 생각도 안 한다. 그런데 고기가 알맞게 익어서 실컷 먹다보면, 어느새 시커먼 아랫면을 드러내는 것이다. 먹지 못하면 땅을 치고 후회할 음식도 아니고 별로 신경쓰는 사람도 없어서, 늘 '어. 탔네.'하고 말지만 그때마다 어떤 알 수 없는 아쉬움에 괜히 집게들 들었다 놨다 한다.


나는 양파를 잘 굽는 사람이 되고 싶다. 모두가 고기에 열중할 때, 바깥을 살필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나는 늘 눈앞의 문제를 벗어나지 못한다. 천천히 타는 것들을 감지하는 섬세함이 부족하다. 내 인격은 고작 향기롭게 지글대는 고기에만 한정 되는 것 같다. 당장 나에게 직면한 것들 말고 내 삶을 멀찍이서 둘러싸는 현상에도.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나와 연결된 사람들과의 관계에도 여전한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이 되고 싶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나는 고기굽는 사람. 가까운 친구에게 연락도 잘 안하면서, 어색한 사람에게는 헤픈 웃음을 남발하는 사람. 지하철을 고치다 죽은 또래의 소식을 뉴스로 소비하고, 지하철을 놓치는 일에는 그 무엇보다 마음아파하는 사람. 열심히 고기 굽고 양파는 아무렇지도 않게 태우는 사람. 사람사람 그런 사람이다.


'나는 왜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김수영 시인의 말을 양파굽기로 다시금 체감하게 되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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