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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댐 Mar 19. 2021

미숙함의 시간을 미끄러지는 중

우리 동네만 그랬던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린 시절 인라인 스케이트라는 말보다 롤러블레이드라는 말을 더 많이 썼다. 롤러블레이드, 롤러블레이드. 발음마저 부드럽게 구르는 듯한 이 단어가 입에서 마르지 않고 쓰이던 그 시절, 나에게는 걷는 것보다 롤러블레이드를 타는 게 더 익숙했다.


롤러블레이드를 타고 계단을 오르는 것쯤은 문제도 아니었다. 그냥 내 몸의 일부와 같아서, 그걸 신고 바닥에 앉았다가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났고, 점프도 했고, 꽤 높은 담장을 넘어서 뛰어내리기도 했다. 무릎이고 햄스트링이고 발바닥이고 아프거나 뻐근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가능한 움직임이었다. 동네의 어떤 멋진 형은 롤러블레이드를 탄 채로 지하철 계단을 브레이크 없이 미끄러져 내려가기도 했다. 우리들은 그걸 신고 매일매일 이곳저곳을 미끄러졌다.


내가 살던 아파트는 단지의 제일 높은 지대에 위치해있었다. 버스 종점이기도 했다. 버스는 아파트 단지 바깥 쪽을 따라 이어진 2차선 도로의 경사를 굽이쳐 올라왔다. 차들이 자주 다녀 위험한 곳이었지만, 제지하는 어른들도 없었고 위험성을 신경 쓰는 아이들도 없었다. 자전거로, 퀵보드로, 롤러블레이드로… 수많은 아이들이 시도 때도 없이 그 급경사를 타고 오르내렸다.


롤러블레이드에는 뒷꿈치 쪽에 브레이크가 달려있었는데,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 그걸 제거하는 게 멋이었다. 거추장스러운 부분이 사라지기 때문에 실용적이기도 했다. 롤러블레이드가 한 몸처럼 느껴지자, 나도 브레이크를 떼기로 했다. 


결과적으로 그 선택은 화를 불러왔다. 며칠 지나지 않았을 때, 그 급경사의 내리막길에서 불의의 사고를 겪게 된 것이다.


그날은 혼자 소소한 기분으로 집을 나선 날이었다. 난코스에 도전하거나 대단한 스릴을 즐기려고 했던 것도 아니었다. 집 앞에 있던 공원에서 롤러블레이드를 좀 타려고 했을 뿐이었다. 공원 쪽으로 연결된 계단으로 갈 것인가, 급경사 내리막을 타고 갈 것인가, 평소에도 S자를 그리면서 내려가던 길이었기 때문에 나는 크게 고민하지 않고 내리막길을 택했다.


내리막길에서 시원한 바람을 가르고 과속방지턱 하나를 넘자, 속도는 무섭게 오르기 시작했다. 습관적으로 앞꿈치를 들어 속도를 줄이려고 했었는데 브레이크가 없었다. 발을 T자로 만들어서 속도를 줄이는 방법밖에 없었는데, 순식간에 속도가 너무 붙은 바람에 한쪽 발을 뗄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제어할 수 없는 속도로 나는 마치 사고처럼 질주했다. 그러던 찰나, 저 멀리 보이는 코너에서 초록색 마을버스까지 올라오고 있었다. 나는 오른발을 가로방향으로 만들어 속도를 잡으려 했으나 힘 조절에 실패한 나머지 몸이 홱 돌아가고 말았다. 손과 턱이 바닥에 부딪혔고, 바닥에 닿은 면이 쓸린채로 몸은 반바퀴 회전한 뒤에야 멈추었다. 입술 밑부터 턱까지 너덜너덜해졌고, 손바닥도 온통 까졌다. 무릎 팔꿈치 모두 성한데가 없었다. 나는 피를 뚝뚝 흘리며 다시 그 오르막을 천천히 걸어올랐다. 그때의 상처는 아직도 자그맣게 남아있고, 회복하는데도 한참이 걸렸었다.


언제부턴가 그렇게 크게 다칠 일이 없게 되었다. 나는 이제 언제나 안전을 지향한다. 위험한 내리막에 도전하지도 않고, 높은 곳에도 잘 올라서지 않으며 함부로 뛰어내리는 법도 없다. 쓸데없이 누군가를 웃기려고 나서지도 않고, 정적을 채우려고 말을 건네지도 않는다. 누군가에게 처참한 비난의 말을 하지도 않는다. 경험을 통해 배운 대로 위험을 최대한 피하고, 나름대로의 최선을 택하면서 몸을 적당히 사린다.


요즘의 나는 예전보다 충분히 성숙해졌다고 생각한다. 말도 안되는 실수들, 베개와 이불을 걷어찰만한 실수를 저지르는 빈도가 현저하게 낮아졌음을 느낀다. 진작에 이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기도 한데, 그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안다. 내가 저지른 실수들에 어떤 할당량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걸 채우지 않고서는 성숙의 단계로 진입할 수가 없는 것이다. 성숙해진다는 말 자체에 이미 미성숙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도 알겠다. 공장에서 완성된 기성품에 성장이라는 단어가 없듯, 애초에 완성된 인간은 성숙할 수 조차 없다는 것. 미성숙한 존재만이 성숙해질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결국 나를 이만큼 키운 것은, 아직도 턱에 자그맣게 남아있는 그 상처와 흉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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