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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댐 Apr 22. 2021

10년 연애의 비결을 물어봤더니

관계와 조율에 대하여

끊임없이 누군가를 만나고 헤어지면서도 매번 새로운 씁쓸함으로 다가오는 한 가지 사실이 있다면, 마음이 ‘변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싫은데도 자꾸만 마음이 변한다. 미숙한 나의 연애에는 늘 일정한 패턴이 있다.

 


누군가를 만난다. 그녀는 대체로 아름답다. 신체적으로 매력적인 부위가 눈에 확 들어오든가, 태도가 사려 깊어서 끌린다. 궁금해진다. 그녀의 이야기는 무척이나 재미있다. 나는 자꾸 질문하고, 그녀는 기쁘게 대답한다. 그녀도 나에 대해 묻는다. 내가 이야기를 할 때마다 웃음이 터진다. 나는 막 유식한 척을 하고, 어느 정도 괴짜 흉내도 낸다. 최대한 흥미롭게 이야기를 한다. 이야기가 무르익는다. 즐겁다. 첫 만남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경우도 있으나, 보통은 깔끔하게 헤어진다. 연락한다. 매일 같이 주고받는 연락이 자연스러워진다. 어느 순간이 지나면 암묵적으로 연애라는 단계로의 합의가 이루어진다. 형식적인 고백과 함께 연애가 시작된다. 연인이 되면 자주 만난다. 밤마다 통화를 하고, 맛있는 것을 먹으러 가고, 새로운 경험을 하러 이곳 저곳을 누빈다. 밥을 먹고, 돌아다니고, 잠을 자고, 일련의 행동들이 반복된다. 그러다보면 피로도가 쌓인다. 기꺼이 무시했던 단점들이 점점 크게 보이고, 귀찮음도 생긴다. 혼자만의 시간도 더 각별해진다. 성의가 줄어들기 시작한다. 기꺼이 감수하던 수고로움에 효율이라는 단어가 자주 붙는다. 효율적으로 만나다보면 더 이상 재미가 없다. 매력적이고 재미있던 그녀와의 대화가 뻔하고 지루한 것으로 바뀐다. 그녀의 가슴이나 엉덩이, 잘록한 허리라든지 다리 같은 것들에 더 이상 처음처럼 흥분하지 못한다. 사소한 것으로 어긋난다. 다툼이 시작되고 반복되다가...


이별한다.



나만이 가진 패턴이 아닌 것을 안다. 알랭 드 보통은 거의 30년 전에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을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같은 작품으로 남겼고, 수많은 사람들을 열광시켰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나와 같이 미숙하다고 해서 이별하는 비참함이 줄어드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세상의 주인공이었다가, 흔해빠진 진부한 이별의 케이스가 되는 일은 앞서 밝혔듯 거듭 경험해도 쉽게 적응되지 않는다. 매번 같은 식의 패턴을 반복하면서도, 그걸 다시 새롭게 시작하고야 마는 <이터널 션샤인>스러운 나에게, 나는 자주 실망한다.


반면 내 절친한 친구 S는 지금의 여자친구를 2010년 6월부터 만났다. 둘은 내가 보기에 그야말로 이상적인 커플이다. 자상하고 속이 깊고 똑똑한 내 친구와. 애교가 많고, 요리를 잘하고, 손재주나 말솜씨가 야무진 그녀는 태어날 때부터 짝으로 정해진 듯 완벽해 보였다. 내가 여러 사람들과 만나고, 질려하고, 헤어지는 행동들을 반복하는 동안, 그들은 별 탈도 없이 나란히 20대를 통과하고 있었다.


어느 날은 친구에게 물었다. 그렇게 오래 만날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이냐고. 친구에게 들은 대답은 의외였다.


“우리도 처음부터 잘 맞은 건 아니었지. 조금씩 맞춰가면서 여기까지 온 거야.”


애초에 잘 맞아보였던 그들도 맞춰간 거였다니. 어쩌면 그게 되게 당연한건데, 그런 생각을 못하고 있었다. 운이 좋아 서로를 잘 만났다고만 생각한 것이다. 덩달아 나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되었다. 나는 어떠했던가. 나는 누군가와 조율한다는 것을 잘 할 줄 모르는 사람이다. 사랑한다면 상대방을 바꾸려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수용하라는 말을 책에서 본 이후로, 늘 그렇게 하려고 노력했다. 입으로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내 입맛대로 상대방에게 변화를 강요하는 것은 해서는 안될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상대방을 수용하고, 참는다는 행위는 언제나 나를 지치게 만들었고, 종국에는 이별을 불러왔다. 갈등을 해결하지 못하고 참거나, 헤어짐을 결심해버리는 나의 버릇을 S에게 설명하자 S는 명쾌하게 대답했다.


“네가 누구를 만나든 맞지 않는 면이 있을 텐데, 그럼 그때마다 헤어질 거야?”


상대방을 변화시키는 것과, 관계를 조율한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문제라는 말이었다. 가끔은 자신 스스로조차도 낯설어하는 게 인간인데, 어찌 타인이 내 마음과 같겠냐는 투의 말이 나에게는 무겁게 다가왔다. 그러면서 친구는 일종의 상황극처럼 예를 들어 보여주었다. 아이를 타이르듯 조곤조곤한 말투였다. 자신의 기분과 주관을 밝히고, 잔잔하게 요청하는 친구의 말투에 저절로 설득되는 기분이었다.


사실 친구의 명쾌한 해답을 들었으면서도 여전히 자신이 없다. 누군가와 사소한 것들부터 중요한 문제까지 맞춰나가는 일이 나에게는 아득하게만 느껴진다. 어쩌면 내가 타인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겠다고 말한 배경에는, 무엇보다 내가 타인에 의해 바뀌고 싶지 않아서, 있는 그대로 수용되고 싶어서인 것 같기도 하다. 누군가와 의견을 조율하고, 변화하는 과정이 두렵고 번잡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늘 운명적인 반쪽에 대해 생각하면서 애초에 짝이 맞는 레고 블록 같은 것은 없다는 사실을 외면해왔던 것 같다. 꼭 맞아 보이는 블록들은 알고 보면 S처럼 오랜 시간 공들여 서로에 맞게 깎아온 결과일 것이다. 둘이 깎아왔을 10년의 시간들을 생각하면 아찔할정도로 멋있게 느껴진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이 돈으로 살 수 없는 것과 차곡차곡 오랜 시간 쌓아온 것이라는데, 이 두 가지를 모두 가졌으니 내 친구는 얼마나 훌륭한 사람인가. 새삼스레 존경심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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