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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댐 Apr 13. 2021

서른 살에 죽기로 했(었)다

당도한 서른

스무 살 즈음이었을 것이다. 절친한 친구에게 나는 참으로 호기롭게,


'서른 살에 자살할거야'라고 말했다.


사실은 그냥 단순한 허세였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나름의 이유가 있기는 했다. 


그러니까, 스무 살 즈음의 나에게는 서른 살 이후의 삶들이 모두 시시하게만 보였다. 방학도 없는 회사를 다니고, 밤새 놀지도 못하고, 세상 모든 짐을 다 뒤집어 쓴 듯 우는 소리나 하고, 사회는 냉정하다고만 하고, 사는 게 팍팍하다고만 하고, 배 나오고, 결혼해서 애 키우느라 자기 자신은 온데간데 없고, 그러다 중년이 되고, 늙고, 못생겨지고, 병약해지고, 뭐 그런 것들. 그런 이미지들만 떠올랐다. (나에게 멋진 롤모델이 없었기 때문이라고도 생각하고 있다.)


반면에 내 손에 잡힐 듯한, 특히 이십대 중후반의 세계에는 멋있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온통 음악을 하고, 운동을 하고, 연애를 하고, 여행을 다니는 사람들이었다. (다들 나름의 불안감으로 똘똘 뭉쳐있었을 테지만) 대체로 자신감이 넘쳤고, 밝은 에너지가 주변을 감싸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렇게 반짝반짝하던 사람들도 서른을 거치면 무슨 노잼의 관문이라도 되는 듯, 시시해져갔으니. 내가 이십대를 찬양하고 삼십의 무덤에서 자살하겠다고 말 한 것에도 나름의 이유가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어영부영 서른이 되었을 때는, 조금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죽기가 애매해졌다. 서른이 되고보니 스물 아홉의 나와 별로 달라진 것도 없었을뿐더러 삶에 대한 미련도 여전했던 것이다. 스물 아홉과 서른은 엄청난 높이의 계단 하나 차이라고 생각했는데, 인생은 완만한 오르막길에 가까웠다. 쌩쌩하던 스물아홉이 서른이 되면서 축 처지며 재미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냥 그라데이션으로 나라는 사람 자체가 노잼이 되어가는 것이었다. 그냥 세상의 규칙과 흐름에 천천히 녹아들어가는 과정에 놓여있을 뿐이었다. 


오늘은 어떤 글을 읽다가, 나처럼 서른에 죽을 거라고 말했다는 사람을 발견했다. 서른에 죽기로 했던 사람이 나 하나는 아니었구나 생각이 들어 웃음이 났다. 그 사람도 아마 나와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스물 아홉까지의 계단을 오르고 멋지게 떨어져 죽겠다. 서른이라는 ‘시시한 층’에는 당도하지 않겠다. 그렇게 다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도 뚜벅뚜벅 인생의 오르막길을 걸어 올라서, 자신이 서른이 된 줄도 모르고 살아가고 있겠지. 


서른이 뭐라고 서른서른 거리는지 가소로워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10년에 한 번씩 돌아오는 전환은 나에게 소중하다. 나는 스무 살 때도 스물이라는 나이를 무척이나 쑥스러워하면서도, 스물 스물 했었다. 마흔이 되면 또 마흔마흔 할 것이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스물의 나는 서른에 죽겠다고 했지만, 서른의 나는 마흔에 죽겠다는 소리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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