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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댐 May 19. 2021

‘미스터리’라는 악마에 대하여

소비되는 혹은 무시되는 죽음들

스무 살 이후로 교회에 발길을 끊은 나지만, 중고등학교 때에는 꽤나 착실하게 교회에 다녔다. 주말이면 단상에 올라, 기타를 치고 찬송을 부르며 예배의 도입부를 꾸미는 찬양인도자로도 활동했을 만큼 교회 활동에 열심이었다.


그런데 사실 ‘믿음’은 없었다. 나는 거기서 만난 사람들과 교류하는 것이 즐거워서, 관성처럼 교회에 다니는 아이였다. 그래도 ‘찬양인도자’라는 감투 때문인지 신앙 없이 교회 다닌 것치고는 성실하게 예배를 준비하는 편이었다. 토요일 밤이면 다음날 부를 찬송곡을 미리 선곡하고, PPT를 만들었다. 주일 아침에는 예배 한시간 전에 미리 도착해서 그날의 곡들을 다시 한 번 연습했다. 깜깜한 예배당에서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있으면 스트레스도 풀렸고, 마음도 한결 차분해졌다.


중고등부 예배당이 지하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계절과 상관없이 어두웠다. 그렇다고 아침부터 모든 불을 켜 두기에는 낭비 같아서, 앞쪽의 작은 조명들만 몇개 켜 두곤 했다. 길쭉한 예배당 의자 맨 앞에 보면대를 펼쳐놓고 앉아서 악보를 보면서 기타를 쳤다.


그러던 어느 날은 신비한 경험을 했다. 열심히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부르고 있는데, 구석에서 쪽문 열리는 소리가 났던 것이다. 그 아침에는 내려올 사람도 없었는데, 누군가 슬리퍼를 찍찍 끌면서 내 쪽으로 다가왔다. 나는 궁금했지만 굳이 고개를 돌리지는 않은 채 노래를 계속 했다. 처음엔 별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주일 아침에 슬리퍼라니? 그리고 그 소리는 내 쪽으로 점점 크게 다가오고 있었다. 길쭉한 예배당의 의자들이 놓여있던 자리를 대각선으로 관통하면서. 귀신이 아니고서야 물체들을 무시하고 움직일 수 있을까?


나는 순간적으로 무엇인가가 잘못되었음을 느꼈고, 극심한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고개를 돌릴 수는 없었다. 그게 진짜 귀신이면 어찌하나 싶은 마음이었다. 어느새 슬리퍼 소리는 내가 앉은 자리까지 거의 다 도착했고, 나는 비로소 연주와 노래를 멈추었다. 슬리퍼 소리도 멈추었다. 누군가 나를 쳐다보는 듯한 기척이 오른쪽 귀 뒤 너머로 느껴졌다. 잠깐의 정적. 나는 기타를 앞으로 집어 던지고 소리를 지르면서 밖으로 뛰쳐나갔다. 주변을 살필 겨를은 없었다.


한참 뒤 다시 내려간 곳에는 귀신이 없었다. 다만, 정체불명의 슬리퍼 한 짝이 놓여있을 뿐이었다. 나는 지금도 그것이 귀신인지, 아니면 우연에 우연이 겹친 것인지 알지 못한다. 귀신이라는 것도 믿지 못하겠고, 귀신이 아니라는 것도 믿지 못하겠다. 교회를 그만 다니게 된지 벌써 십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그때의 기억은 생생하다. 격렬한 심장박동과 지하 예배당의 축축한 공기까지도.


요즘은 한강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은 대학생 이야기로 떠들썩하다. 수사기관에서는 사고의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지만, 여론은 그와 함께 술을 마신 친구를 유력한 용의자로 간주하는 듯 하다. 나는 사건의 진실에 대해서 알 수 없고, 누구를 범인이라 특정하고 싶지도 않다. 다만, 이 사건이 지나치도록 구설에 휩싸이게 된 것은 (CCTV로 가득해서 의혹이라고는 발생할 수 없는) ‘서울’에서 드물게 ‘흥미로운’ 미스터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를 생각한다.


여기서 ‘흥미로운’이라고 따옴표를 표시한 것은, 이 사건을 흥미롭게 여기고 싶지 않아서다. 이 글을 쓰는 이유도 지나친 사람들의 관심, 그리고 그 너머에 자리잡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흥미’ 때문이다.


영화나 드라마 속에서 미스터리가 없다면 어떻게 될까. 나는 그런 이야기는 보지 않을 것이다. 모든 이야기에는 흥미롭게 감춰진 것들이 있고, 그것은 적절한 시기에 공개된다. 심지어 연애물마저도 알고보면 크고 작은 미스터리로 점철되어 있다. 내가 처음에 밝혔던 귀신 이야기도 이야기의 전체를 미스터리가 관통하고 있다. 하지만 이 미스터리가 현실에 개입하게 되면, 누군가의 안타까운 죽음 마저도 지나친 ‘흥미거리’로 전락하고 만다.


요즘은 <그것이 알고싶다> 같은 범죄 취재물, <알쓸범잡>,<꼬꼬무>과 같은 범죄 해설류의 프로그램들의 전성기인 것 같다. 나는 이러한 프로그램을 ‘흥미롭게’ 시청하는 시청자인데, 가끔은 내가 왜 이런 것들을 안전한 방안에서 보고 있을까 생각한다. 그것은 아마도 재미있기 때문인데, 그 재미라는 것에 불쾌한 기분을 느끼게도 된다. 누군가의 불행을 여가시간에 안전하게 소비한다는 사실이, 동물원에 갇혀 괴로워하는 동물을 구경하는 것처럼 묘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미해결 범죄를 공유하여 사건의 전말을 밝혀낸다고 하지만, 억울한 사건을 널리 알려 경각심을 일깨운다고 하지만, 거대 권력에 의해 은폐될 만한 사건을 재조명한다고 하지만… 이것이 결국 한가로운 사람들의 흥미거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한강 대학생 사망사건과 <그것이 알고싶다>에 쏠리는 관심이 반복되는 산업재해의 희생자들에게 고루 분배되지 않는다는 점을 여러 곳에서 지적하고 있다. 누군가는 지하철에서, 공장에서, 부둣가에서 일을 하다 죽는데 여기에는 미스터리가 없어서 관심을 얻지 못한다. 누군가는 한강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았는데, 여기에는 미스터리라는 악마가 있어서, 그저 소비된다. 나는 이 모두가 작은 비극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문제를 생각하면 늘 어렵고 혼란스럽다. 슬리퍼를 찍찍 끌면서 나에게 다가왔던 그 정체불명의 존재가 귀신이었는지 아니었는지 알 수 없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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