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댐 Jul 22. 2021

행복을 말하기엔 아직 이른가

솔론, 최윤희, 그리고 나

기원전 560년 경 리디아의 왕 '크로이소스'는 당시 유명했던 아테네의 현자 '솔론'을 자신의 보물창고에 데려와서는 물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누구냐!" 크로이소스는 당연히 자신의 이름이 불릴 것을 예상했지만, 솔론은 왕의 이름을 얘기하기는 커녕 먼저 죽은 아테네 시민들의 이름만을 얘기했다. "나보다 그들이 행복하다고?" 왕이 묻자 솔론은 "그들은 좋은 삶을 살다가 영예로운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왕이시여. 지금은 행복하실지 몰라도 장차 일이 어찌될지 알 수 없는 노릇인데, 어찌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까." 얘기할 뿐이었다. 


크로이소스는 정말 솔론의 말처럼 행복을 말하기엔 이른 사람이었다. 그는 이후 사랑하는 아들이 사고로 사망하는 아픔을 겪는가 하면, 자신조차도 전쟁에서 패해 화형당해 죽었다. 크로이소스는 화형대에서 죽음을 맞이하며 불현듯 떠오른 솔론의 이름을 세번 외치며 절규했다고 한다.




어느샌가부터 나는 행복의 비밀을 전하는 사람들을 신뢰할 수가 없게 되었다. 책이나 강연을 통해 행복을 말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강인해보이고, 단단해보이고, 긍정적이며 감히 훼손할 수 없는 에너지로 가득 차 있는데 정작 그 자신들도 늘 그와 같은 마음으로 살아내지는 못하는 것 같아 보였다.


학창시절 엄마가 즐겨보던 아침교양방송에는 이른바 행복전도사로 불리던 최윤희라는 사람이 자주 나왔다. 그녀는 예쁘지 않은 외모, 어눌한 말투에도 불구하고 개성과 자신감, 여유로 빛나던 사람이었다. 그녀는 언제나 사근사근한 말투로 주부들의 고민을 상담해주곤 하였다. 복잡한 문제를 늘 단순하고 명쾌하게 풀어주는 그녀의 화법은 내가 보아도 근사했다. 나에게는 tv에 종종 출연하는 익숙한 방송 패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으나, 아무튼 그녀의 행복론은 어렴풋이 내 마음 언저리에도 남게 되었다. 


그러다가 내가 스무살 되었을 무렵이었나, 그녀를 오랜만에 인터넷 뉴스기사를 통해 보게 되었다. 그리고는 온몸이 굳은 채로 잠시 숨도 멈추었다. 충격적인 기사였기 때문이다. 그녀가 남편과 함께 동반자살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녀는 행복에 관한 저서들과 타인의 아픔을 상담하는 과정에서 무수한 어록을 남겼지만, 정작 자신은 끝내 행복하지 못하고 죽음을 택하고 말았던 것이다. 일면식도 없는 사이였지만, 나는 모종의 배신감마저 느꼈다. 그녀를 통해 어느정도 위로받고, 행복의 비밀을 전수받았다고 믿었는데 그런 것들이 와르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그 박탈감에 나는 그녀를 애도하기도 전에 조금 슬퍼지고 말았다.


희극인 박지선씨가 떠났을 때도 그랬다. 나는 그녀가 남긴 자존감에 관한 이야기들, 강연들을 몇 번이나 돌려보면서 좋은 영향력을 전달받은 여러 사람중에 하나였다. 그녀의 내밀한 사정을 알지 못하지만 그녀가 허망하게 죽음을 택했을 때, 나도 나의 마음 속 일부가 조금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허무하고 우울했다.


가족과의 관계회복, 우울감 극복 등 긍정적인 에너지를 마구 설파하던 유명 강연자도, 한동안 강연을 멈추고 두문불출하다가 사실은 현실속의 자신과 강연자로서의 자신 사이의 괴리 때문에 힘들었다는 얘기를 뒤늦게 털어놓았다. 짐 캐리도 한때는 우울증을 앓았다가 이를 이겨내고 나서는 우울증 극복에 관한 책까지 썼지만, 여자친구의 죽음 이후 다시 우울의 늪에 잠식되었다는 얘기도 어디선가 듣게 되었다. 


행복에 대해서 직업으로 강의하는 사람들 마저도 때때로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완전히 무너지는 모습을 종종 보게 된다. 그러다보니 이제는 행복을 말하는 사람들이 다 사기꾼처럼 느껴지거나, 하염없이 미숙한 존재로 보이기까지 한다. 누군가 기분 좋게 웃으며 별일도 아니라는 듯. 간단하게 자신의 행복론을 설파하는 모습을 보면,


어찌 그리 경솔하신가요. 어떻게 그렇게 가볍게 말씀하시나요. 누구나가 언제든지 행복할 수 있다고 단언하는 거. 너무 위험하지 않나요? 당신은 어떤 괴로움과 풍파 속에서도 행복할 수 있다고요? 그 말에 책임질 수 있어요?


혼자서 괜히 중얼거리는 버릇이 생겼다. 


솔론은 말했다. 결말이 오기까지 행복을 말하기엔 이르다고. 누군가의 행복을 말하기 위해서는 비로소 그가 행복을 잘 유지해서 좋은 죽음을 이룬 다음에야 가능하다고. 나는 이 말에 깊이 공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혼란스러워진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 행복을 말해야 하는가. 삶과 죽음, 행복 앞에서 끝없이 겸손해질 수밖에 없는 것인가. 


가볍게 행복론을 설파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행복을 말하다가 자신의 우울을 이겨내지 못하고 먼저 세상을 떠난 사람들을 떠올리면서, 나는 자주 아득해진다. 그럴때면 섣불리 행복을 자신할수도 죽을때까지 행복을 의심할수도 없는 사람이 되어, 갈팡질팡. 여러 갈래로 뻗은 길에 덩그러니 서 있는 기분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글쓰기가 늘지 않는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