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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댐 Aug 03. 2021

하루는 쏟아진 물처럼 증발이 되고

자정이 지나면 물컵이 넘어진다. 왈칵. 하루가 바닥으로 쏟아진다. 가장자리부터 말라간다. 24시간이 24시간동안 지나간다. 건조해진 바닥에는 물의 흔적이 없다. 쏟아진 물의 모양은 제각각이고, 그걸 기억하는 사람은 나뿐이다. 언제나 그 모양은 왜곡된다.


하루가 하루가 하루가 수없이 많은 하루가 지나가고 또 다가온다는 사실은 무섭기까지 하다. 이 하루들이 모여 누군가에게는 금메달이 되고, 누군가에게는 박사학위가 된다. 누군가에게는 통장 잔고로 남기도 한다. 반면 나에게는 별로 남은 게 없다. 나의 하루들은 어쩐지 쏟아졌다가 말라버린 물처럼 흔적도 없다. 그럴때면 조금 서글퍼진다. 내 하루들은 증발된 물처럼 흔적도 없다. 내 하루들은 증발된 물처럼, 뻣뻣한 바닥처럼 흔적도 없다. 기억으로라도 남아있으면 좋으련만, 대체로 기억도 휘발성인 듯 싶다.


기억하지 못하는 하루들은 살지 않은 셈 쳐야할까? 그 하루들은 오로지 나를 하루만치 늙게 했을 뿐. 온데간데 없다. 언젠가 해안가 그 초소에서, 호롱호롱 촛불처럼 흔들리는 별빛 아래에서, 꾸벅꾸벅 조는 사수 옆에서, 나는 마구마구 과거의 기억들을 떠올려 본 적이 있었다. 내가 그때 떠올릴 수 있었던 것은, 아무것도 떠올릴 것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내가 억지로 기억해내면 할수록 기억들은 자꾸만 벽틈으로, 밤의 어둠 속으로 숨어들어갔다. 기억이라는 것도 결국은 피동이구나, 내가 의지로 해낼 수 있는 것은 세상에 별로 많지 않았다. 그때 깨달았다.


기억을 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이 나는 것이었다. 사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게 되는 것이었다. 잊는 것이 아니라 잊히는 것이었다.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슬퍼지는 것이었다. 인간은 감정으로 존재하고 기억으로 증명되는 것이었고, 그 모두를 나는 억지로 해낼 수는 없었다. 그 사실을 여러번 확인하는 밤이었다.


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나는 멀뚱히 있고, 하루가 저 알아서 흘러가는 것이었다. 산다는 것도 피동이었다. 우리가 원치 않는 죽음을 언젠간 맞듯이, 하루도 원하든 원치 않든 그저 그 자신의 속도로 나를 지나쳐가는 것이었다. 넘어지는 물컵, 쏟아지는 물처럼.


나는 이 피동의 세상에서, 바다를 부유하는 콜라병처럼 둥실 두둥실 무력하게 떠다니는 기분이다. 하루를 하루씩 통과하면 결국 남는 건 내 몸뚱아리다. 하루만큼 늙어진 채로. 온갖 피동의 결과물인 셈이다. 늦은 밤, 이 모든 것이 피동의 영역에 있음을 생각한다. 이런 밤은 자주 찾아올 것이다. 그런 날이면, 그런 밤이면, 나도 모르는 사이 시계를 문득 쳐다보게 될 것이다. 그러면 그때, 언제나처럼 새로운 물컵이 넘어질 것이다. 왈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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