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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댐 Aug 08. 2021

네 덕분에 버텼다

고마운 말

지난주에 군대 후임 K를 만났다. 나보다 4달 늦게 입대해서 군대에 있을때는 나를 깍듯이 따르던 후임이었지만, 사실은 두 살이 많은 형이어서 전역한 후에는 내가 형이라고 부르며 예의를 갖춘다. 매번 형인 후임들을 만날때마다 묘한 기분을 느끼게 된다. 이제는 형인 사람이 나에게 혼난 이야기를 한다든가, 이제는 동생인 내가 형을 혼냈던 이야기를 하게 되니까. "그때 서댐이 진짜 무서웠는데." "그러게 내 말 왜케 안들었어 형." 하는 식이다.


K형에게는 조금 뜬금없이 연락이 왔다. 전역하고 얼마되지 않아 한 번 기쁘게 만났었는데, 그 이후로 거의 6년이 넘게 서로 잊은 듯이 살다가, 내 생일에 뜬금없이 연락이 온 것이다. 한 번 만나자고. 늘 카톡 프로필은 지켜보고 있었는데 그간 여유 없이 살아서 이제야 연락을 하게 됐다는 말이었다. 우린 군시절 아주 친하게 지내던 사이였기 때문에 거리낄 것도 없어서, 그러자고. 반갑게 시간을 조율했다. 이제는 광고회사에 들어가 승진도 하고, 자리를 잘 잡은 모양이었다. 서로 퇴근시간을 맞춰서 만나기로 했다.


맛있는 것 사주겠다는 K형은 변한 게 하나도 없었다. 동안에다가 피부가 참 좋았었는데 늙지도 않고 그대로였다. 우리는 서로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깔깔깔 웃었다. 서댐아 넌 몸이 더 좋아졌네. 형도 진짜 그대로네.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여기 돈까스가 진짜 맛있어. 연돈보다 맛있을 걸?' 하는 형의 말에 잔뜩 기대가 된 돈까스 맛은 그저 그랬지만, '진짜 맛있네.'하고 대답했다. 뿌듯해하는 형 표정이 너무 귀여웠다.


몰랐는데, 나한테 고마운 게 그렇게나 많았었는지. 형은 만나서 밥을 먹을 때부터 자리를 스타벅스로 옮긴 다음까지 내 칭찬을 계속 했다. "서댐아 너는 다른 선임하고 달랐잖아." "서댐아 너는 그러지 않았지만, 다른 선임들은..." "서댐아 네가 그렇게 해줘서," "서댐아 네가 되게 그런 걸 잘해줬잖아" 같은 낯간지러운 말들을 쏟아냈다. 중구난방 이야기들을 다 엮어보니, 여러가지 일들로 인해 심적 고통이 심했었는데, 마침 소대를 옮기고 나를 만나서 군생활 후반부가 참 즐거웠다는 얘기였다.


말 그대로 K형은 다른 소대에 있다가 GOP투입과 관련해서 소대 개편이 일어났을 즈음 상병을 갓 달고 우리 소대로 옮겨왔었다. 연고도 없는 곳에서 막연하게 겉돌고 있을 때, 마침 나와 잘 지내게 되어 군생활을 마음 편하고 재미있게 했다고 했다. 그냥 이래저래 말도 잘 통하는 기분이어서 잘해주었던 것인데, 그게 큰 위안이 되었다니 나로서도 뿌듯한 일이었다.


몇 년 동안이나 쌓여있던 이야기들을 나누느라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카페 영업이 종료되는 시간까지 우리는 떠들었고, 형의 이야기는 대부분 나에 대한 고마움이었다. 거의 헤어질 시간이 되었을 때. 형은, "힘든 군생활 서댐이 네 덕분에 버텼다."는 말을 힘주어 했다.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가슴 속 어느 곳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 치솟는 기분이었다.


사실 요즘 힘든 시기를 겪고 있었다. 회복되지 않는 우울함에 자존감은 거의 바닥까지 떨어졌었고, 의욕이 나질 않아 영화도 보지 않고, 글도 쓰지 않는 시간들을 오래 보내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우는 소리하기에는 또 자존심이 상해서, 가장 친한 친구에게도 전화를 못하고 혼자 침대에서 뒹굴거렸다. 정신이 몸과 이어져있는지 여기저기 이유없이 아프기까지 했다.


그런데 마침 K형이 찾아와서 작정이라도 한 듯 나에 대한 좋은 이야기만 해주는데, 아. 내가 생각보다 멋진 사람이었구나. 하는 생각을 굉장히 오랜만에 하게 되었다. K형 말에 따르면 나는 불의에 맞서 싸우고, 유머 감각이 있고, 후임들이 잘 따르고, 여유가 넘치고, 다른 위협으로부터 든든한 방어막이 되어주는, 그런 멋진 선임이었다.


물론 진짜 그랬나면, 당연히 아니었다. 전역하고 만난 어떤 후임은 "서댐아. 내가 전역하고 너 찾아가서 팰려고 얼마나 칼을 갈았는 줄 아냐?"라고 말하기도 했고, 다른 후임은 "같은 욕도 서댐이가 하면 진짜 너무 모욕적이고 수치스러워서 기분이 정말 나빴어."라고도 했다. 전역 후에 후임(이자 이제는 친구인)들을 종종 만나는데, 그때마다 평가는 자주 엇갈렸었다. 말하자면, 좋은 점도 나쁜 점도 있었던 흔한 선임이었던 것이다.


그냥 평범한 군생활을 했다는 것과 평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던 나라는 사람을 객관적으로 알지만, 그래도 K형의 말을 들을 때는 마냥 기분이 좋았다. 적어도 한 사람에게는 의지처였고, 버팀목이었구나. 누군가에게는 오래오래 기억에 남는 좋은 사람이었구나. 하는 마음에 안도감과 뿌듯함이 무척 들었다.


형은 지하철 역까지 내려와서 카드를 찍을 때까지 배웅해주었다. 손을 흔들고 헤어지면서, 형은 마지막까지 고맙다 했지만, 진짜 고마운 건 내 쪽이었다. 10시가 갓 넘어 사람이 많은 열차였지만 운좋게 자리가 금방 나서 앉기까지 했다. 이래저래 기분이 좋았다. 3호선 지하철에 앉아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누구한테 자랑도 못하고 혼자서 실실 웃어대는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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